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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고고학방 연구생 (4/126)

3장. 고고학방 연구생

허억, 허억…

발에 상처가 나는지도 모른 채 달리고, 또 달렸다. 꿈속을 뛰고 있는 듯 몽롱하고 울렁대는 기분. 더 달리면 폐가 터질 것만 같은데, 이 다리는 왜 도무지 멈추질 않는 것인가?

‘아아, 저기에 맛있어 보이는 것이….’

어둑한 공원의 나무 수풀 사이에 어슬렁대고 있는 잡귀가 보여, 신라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 쏜살같이 달렸다. 잡귀가 존재를 알아채고 당황해하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휘익-

그녀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든 길쭉한 것이, 귀신의 몸을 뚫고 건너편 나무 기둥에 팍! 소리를 내며 박혔다.

「키익-!」

잡귀는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땀에 젖은 긴 머리칼을 추스를 새도 없이, 그녀는 화살이 날아든 쪽을 분노에 찬 표정으로 노려봤다. 커다란 활을 들고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고고학 연구실의 조교 혜령이었다.

“눈빛 봐. 반하겠는데?”

수풀에서 또 다른 이가 걸어 나왔다. 그는 신라가 반항하기 전 그녀의 두 손을 낚아채 결박시키고 마주 보게 만들었다.

“유신라.”

“이거 놔!”

“쉬이…. 가만히. 지금 도와줄 테니.”

한신후 교수는 한 손으로 신라의 두 손목을 붙들고 남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가, 키스할 듯 입술을 벌린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저항하는 신라의 힘이 점점 세지기 시작했다.

“제법인데.”

누구를 향한 지 모를 말을 내뱉은 그의 입술이, 곧 스스스- 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라의 입술 사이로 형체 없는 것이 새어 나와 그대로 그의 입술로 빨려 들어갔다. 약 1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그는 신라의 몸을 놓아주었다.

“허억, 허억….”

제정신을 차린 신라가 숨을 몰아쉬며 한 교수를 노려봤다. 그는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시며 눈썹을 들썩였다.

“왜 그러지?”

“테스트가 아니라 ‘식사’를 하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요?”

“이 정도로 고맙긴.”

“……”

“그래서, 의식은 있었어?”

신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으며 답했다.

“의식은 있었어요.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도 다 기억나요.”

“우리가 준 약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군. 이제 의식을 하는 수준에서 빙의한 귀신의 힘도 네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단계가 되어야 해. 그래야 우리와 함께 일을 할 수가 있어.”

활을 가방에 넣으며 다가온 혜령이 손수건을 꺼내 신라의 얼굴에서 땀을 닦아 주었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한 교수의 시선이 신라의 얼굴부터 더럽혀진 맨발까지 훑어내렸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흙투성이가 된 발을 예고 없이 쥐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더러워요!”

“상처 주변만 먼저 털어내고.”

그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신라의 양발을 털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혜령이 타이밍 좋게 건넨 물휴지로 흙먼지까지 닦아냈다.

민망함에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신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빙의되자마자 정신없이 뛰쳐 나와서 어차피 신발도 없는데….”

“또 지도교수에게 발이 닦이기 싫다면 얌전히 업히든지.”

“……”

업히기 쉽도록 발치로 다가온 큰 등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신라는 업히는 것이 창피할지, 발이 닦이는 것이 창피할지 잠시 저울질했다. 하지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혜령이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작게 한숨 쉰 한 교수가 말했다.

“마주 보고 안아주길 원한다면-”

“업혀요, 업힌다고요.”

신라는 결국 차악을 선택했다.

혜령은 자가용으로 따로 귀가했고, 차에는 한 교수와 신라 둘뿐이었다. 신라는 옆에서 운전하는 한 교수를 힐끔 쳐다봤다. 값비싼 세단과 잘 어울리는 남자. 고대부터 존재했던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시대에 완벽히 녹아들게 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이성을 잃으면 혼째로 상대를 집어삼킬 수 있는 괴물.’

불안함이 엄습하자 손끝부터 힘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애써 담담하게 두 손을 깍지 껴 보지만 무리였다. 그런 그녀의 동태를 눈치챈 한 교수는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편의점 앞에 잠시 차를 세웠다. 그리고 혼자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갔다.

‘뭐지?’

신라의 걱정스런 눈길이 그의 동선을 쫓았다. 잠시 후 돌아온 한 교수가 건넨 건 편의점에서 사 온 핫초코였다.

“마셔.”

“…아…. 감사합니다.”

경계심을 거두지 못한 신라는 머뭇거리다가 찔끔찔끔 음료의 맛만 봤다. 그녀가 느리게 캔을 비우는 동안 한 교수는 차창을 바라본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 마셨어요.”

“좀 진정됐나?”

“……”

“그럼 출발하지.”

검은 세단은 신라가 사는 빌라의 주차장까지 진입했다. 조금 긴장이 풀린 신라는 긴 숨을 내뱉었다. 빙의는 늘 있었던 일이지만 오늘은 왠지 기를 빼앗긴 것처럼 녹초가 됐다.

한 교수가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직접 열어 주었다. 그리고 신라에게 손을 뻗었다.

“잡아.”

“……”

그녀가 힘없이 손을 내밀자, 그는 그대로 잡아당기면서 자연스럽게 양팔에 그녀를 안아 들었다.

“……”

“얌전하네.”

“…포기한 거예요.”

쿡쿡 소리 죽여 웃은 신후는 그대로 계단으로 향했다. 한층 한 층 걸어 올라가면서 품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고른 지 확인했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내려 확인하려고 하면 곧바로 경계심 가득한 눈길이 닿아 왔다. 그 모습이 날 선 고양이 같아 귀여웠지만, 그는 굳이 그녀를 약 올리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자는 척을 해. 귀신을 자극하지 않으려면.”

“친절한 귀신이네요.”

“게다가 미남이지.”

“여차하면 소리라도 질러야죠. 동네 사람들 다 나오도록.”

“알잖아. 나한테는 그런 거 안 통하는 거.”

“……”

“그날은 예고 없이 널 맞닥뜨렸기 때문에 날 제어하지 못했던 것뿐이야. 이제는 네가 내 앞에 있어도 충분히 이성을 잡고 있을 수 있어. 음기가 넘치는 보름밤만 피한다면.”

“보름밤….”

신라는 복도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행히 오늘은 그믐달이 떠 있었다.

“보름달이 뜨면 어떻게 되는데요?”

“지금은 굳이 알 필요 없어.”

“……”

약간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듯한 남자의 눈에 달빛과 같은 서늘한 광이 스쳐 간 착각이 일었다. 신라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거두고 애써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했다.

한 교수는 신라의 자취방 문 앞에 멈춰 섰다. 비밀번호를 찍으려고 무심결에 손을 뻗은 신라는 슬쩍 그를 올려다봤다.

“눈 안 돌리시네요.”

“알든 모르든 의미가 없어서.”

“……”

오히려 솔직한 것에 대해 안심해야 할까. 그녀는 체념한 채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한 교수는 또 한 번 웃음을 삼키며 말한 것과는 달리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당돌하던 유신라가 이렇게 풀이 죽어 있다니, 재미있네.”

“풀이 죽은 거랑 기운이 빠진 거랑 구분도 못 하세요?”

“농담이야.”

한 교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신라를 내려줬다. 원룸 형태라 생활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신라는 민망함에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혹시 몰라서 잠들기 전 대충 치워놓긴 했지만, 그래도 창피한 건 마찬가지였다.

“수…상한 게 없는 거 확인하셨으면… 그만 돌아가셔도 되…지 않을까요?”

“글쎄. 더 자세히 봐야겠는데.”

표정을 보면 분명 놀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 남자. 신라는 또 한 번 체념하고 그에게 들어올 것을 권했다.

구석구석 닿던 한 교수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가족사진과 유골함에서 멈췄다.

“양친께서 일찍이 타계하셨군.”

“아…. 네.”

그는 혼을 위로하듯 잠시 눈을 감고 묵념했다.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신라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묵념을 마친 한 교수가 말했다.

“네가 왜 학생들 틈에서 특별히 단단해 보였는지 좀 알게 된 것 같아.”

“단단…하다고요?”

한 교수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신라와 자연스럽게 거리를 좁혔다. 손끝에 힘을 주지 않는 걸 보니 이제야 경계심이 조금은 걷힌 듯했다.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는 뜻이야.”

“……”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그건 대부분 귀신들이 괴롭혀서!”

“알아. 시험지를 찾아보니 어려운 문제는 쉽게 맞히면서 엉뚱한 문제를 틀려놨더군. 글씨에 장난을 쳐서 난독증을 일으키는 잡귀들이 심심찮게 있지.”

“……”

한 교수는 미미하게 웃었다. 신라는 민망함에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문득 그의 이마와 목덜미에 맺힌 식은땀을 발견했다.

“더운가요? 시원한 물이라도….”

“아니. 나름 자제력이 강하다고는 해도, 집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까지는 무리인 것 같군.”

그의 몸에서 검은 아우라가 스물스물 삐져나오고 있었다. 신라가 겁을 먹고 한 걸음 물러서자, 그는 멀어지지 말라는 듯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더 안전하게 만들어 주고, 알아서 자리를 뜰 테니까.”

“……”

말과는 달리, 한 교수는 신라를 끌어당겨 품에 가뒀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기대 숨을 골랐다. 핏줄이 불거진 채로 꽉 쥐어진 주먹이 그가 얼마나 자제심을 발휘하고 있는지 보여줬다.

‘이상하다.’

당장 뿌리치고 도망치는 게 당연한 상황이건만, 신라는 그 손을 보고 오히려 불안감이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인간이 마약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약간은 힘이 빠진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찌르르 울리며 파고든다. 강단에 올라 무게감 있게 강의를 하던 그 목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언제 이 애처로운 목소리를 내는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아 버릴지 몰라,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둑시니야. 사람을 홀려서, 그 관심과 애정으로 에너지를 얻는.’

겨우 이성을 다시 다잡았는지, 한 교수는 신라를 놓아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미안.”

그는 신라의 집 곳곳에 자신의 기운을 뿌리기 시작했다. 검은 아우라가 훑고 지나간 자리마다 희미하고 얇은 막 같은 것이 둘러졌다.

“이 정도면 내 기운에 가려져서 네가 평소처럼 쉽게 표적이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는.”

“…고맙습니다.”

작게 오물거리는 입술을 홀린 듯이 쳐다본 한 교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억지로 고개를 틀었다. 정말 이상했다. 단지 귀력만 흘러넘치는 존재라면 이렇게까지 자제력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밤에 돌아다니는 건 삼가고.”

“명심할게요.”

“그럼 내일 연구실에서 보지.”

한 교수는 벗어두었던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신라는 천천히 문가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반면 집안에는 아직 그의 기운이 가득했다. 차갑고 어두우면서도, 묘한 안정감을 주는 그와 닮은 기운이.

그녀는 아까 그의 숨결이 닿았던 목덜미 쪽을 느리게 매만졌다.

창 바깥으로 희미하게 새벽의 기운이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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