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Prologue. 고려야사(高麗夜史) (1/126)

목차

Prologue. 고려야사(高麗夜史)

1장. 귀태

2장. 인간이었어

3장. 고고학방 학부연구생

4장. 욕(慾)

5장. 믿지 못 해

6장. 약점

7장. 빼앗긴 삶

8장. 수상한 움직임

9장. 불가살(不可殺)

10장. 보름밤

11장. 연민

12장. 접근

13장. 수호신

14장. 고백

15장. 친구

16장. 덫_上

17장. 덫_下

18장. 분노

19장. 비형랑(鼻荊郞)

20장. 생일

21장. 불안

22장. 마주침

23장. 설계사

24장. 미명귀

25장. 애초에 없었다

Prologue. 고려야사(高麗夜史)

“바깥이 찹니다, 아씨.”

마당을 쓸던 늙수그레한 여인이 걱정스레 얘기해도, 안색이 창백한 젊은 여인은 웃어넘기며 안채에서 마저 걸어 내려왔다.

“또 뒷산에 가십니까?”

“응. 그 녀석, 배고플 때가 된 것 같아서.”

“고뿔 걸려 크게 앓으실까 두렵습니다.”

“금방 다녀올게. 부엌에서 날고기 한 주먹만 싸 주련?”

“예.”

눈이 포근하게 내려앉는 겨울의 새벽녘이었다. 여인은 노비가 입혀준 털두루마기의 옷깃을 여미며 홀로 느긋하게 뒷산 산책을 나섰다.

눈으로 뒤덮인 산길은 다소 미끄러웠다. 스물이 넘어서도 시집을 가지 않은 이 여인에게는 지병이 있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원의 말에 일찍이 포기했던 것이었다. 애초에 연애나 혼례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말이다.

하늘 한 번 보고, 바닥을 보며 조심히 걷고, 숲의 경치 한 번 보고, 그래도 숨이 힘겹게 차오를 무렵, 눈에 가려진 돌을 헛디뎌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

덩달아 손에서 떨어진 보자기에서 짐승의 날고기가 굴러 나와 눈에 파묻혔다. 무릎을 감싸던 옷감이 뜯어지고 붉은 피가 물들어 나왔다.

잠시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호호 상처 자리에 입김을 불고 있는데, 근처의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뭇 주민들이 봤다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을 커다란 형상의 짐승이 걸어 나왔다.

- 그르릉….

짐승의 모습은 언뜻 보면 커다란 개였으나, 온몸이 칠흑같이 시꺼멓고 검은 안개 같은 것에 휩싸여 있어 범상치가 않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그런데 여인은 놀라긴커녕 반갑게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짐승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먼저 날고기의 냄새부터 맡았다. 그러고 그것을 지나쳐 여인의 무릎에서 냄새를 맡았다.

“아얏.”

할짝이는 혀는 까끌까끌해서 상처가 더 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인은 인상을 찡그린 채로 일단 기다려주었다.

“배고팠지? 저거 먹어. 그런데 너, 엄청 빠르게 크는구나. 내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요만했었는데 말이야….”

짐승은 눈에 파묻힌 날고기를 눈 깜짝할 새 먹어 치웠다.

“잘 크고 있는 걸 봤으니 됐다. 여기까지 오는 것만도 힘들었거든. 난 그럼 가볼게.”

몸을 일으킨 여인은 몇 발자국 못 가서 머리를 잡고 휘청거렸다. 곧 힘없이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짐승이 웅크린 몸으로 폭신하게 받아낸다.

- 명줄이 얼마 안 남았군.

어디선가 낯선 사내의 음성이 들렸지만, 이미 혼절하고 만 여인의 귀에는 들릴 리가 없었다.

짐승은 여인을 등에 태우고 민가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집 대문 밖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가녀린 몸을 문틀에 똑바로 기대앉게 만드는 손은, 놀랍게도 성인 남자의 손이었다.

쿵쿵쿵-

대문 문고리를 잡고 두드린 후에야 손의 주인은 그 자리에서 어둠을 뿌리며 사라졌다.

곧 바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여인을 배웅했던 노비가 문을 열고 나왔다.

“에구머니나! 아씨! 정신 차려 보십시오! 여기 아무나 좀 나와 봐요!”

***

고요한 걸 보니 느지막한 밤이었다. 여인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촛불이 아른아른대는 방 안 풍경을 둘러봤다. 흐릿한 시야에서 여종들이 찬물에 천을 담그며 대화를 나누는 게 보였다.

“그거 들었어? 저기 저 산 너머 고을에 사는 처녀 하나가 해 뜨기 전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구먼.”

“아, 들었고말고. 그 우물이 우리 고을 뒷산 끝자락에 있다지?”

“거기에서 처녀고 총각이고 사라졌다는 얘기가 한둘이어야지. 이 정도면 뜬소문은 아닌 듯싶지?”

“귀신의 짓이라는 소리도 있더구먼. 그래서 용한 무당이 그 주변 고을 사람들에게 그랬대. 시집 장가 안 간 처녀, 총각들은 해 없을 때 여기 뒷산에 발 들일 생각도 하지 말라고. 나는 귀신은 믿지 않지만, 그래도 걱정이야. 우리 아씨가 기운만 생기면 저 뒷산에 가려고 하시는 게, 혹시 벌써 홀리신 게 아닐까?”

“떼끼, 이 사람! 말을 삼가게. 아씨가 돌아오셨을 때 여기로 데려온 사람이 문을 두드렸다며. 왜 정체도 안 밝히고 그냥 갔다지? 충분히 사례했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언제 깨어나시려나. 날이 갈수록 여위시는 거 같아 걱정이야.”

차가운 천이 이마 위로 올라왔다. 여인은 눈을 찔끔했지만 깨어난 것을 알리지는 않았다.

‘문을 두드렸다고….’

다시 잠들 때까지 그녀의 머릿속에는 우울한 눈을 가진 짐승의 모습만 가득했다.

이듬해 봄, 여인은 이불 밖으로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다. 기침을 한번 시작하면 선혈을 토해낼 때까지 하니, 어떤 의원도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녀석이… 보고 싶구나….”

여인이 눈을 감은 채 하는 말에,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여종이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아씨?”

“뒷산에… 사는… 가엾은 짐승 말이다….”

“이제 눈 녹고 봄이 왔으니 잘살고 있을 겁니다.”

“그럴까….”

처음 봤을 때는 피투성이에 손바닥만 한 새끼의 모습이었다. 밤 산책을 하던 중 발견해 고이 품에 안고 물을 먹였다. 지푸라기를 모아 둥지 같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다음 날, 그다음 날, 먹이를 들고 찾아갔다. 경계하면서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가여웠다.

여인의 정성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 짐승은 날로 튼튼해졌고 하루가 다르게 몸이 성장했다.

“눈 감기 전… 한 번만 봤으면….”

오늘이겠구나, 생각했다. 겨우겨우 쉬어지는 숨이 언제 끊길지 모른다고 스스로 느꼈다.

이미 죽었는가, 비몽사몽 사경을 헤맬 무렵 흐릿한 시야에 검은 그림자가 들어찼다. 한기 가득한 안개를 두르고 방에 들어온 것은 바로 뒷산의 그 짐승이었다.

“아…. 이리 보니 좋다.”

- 그르릉….

짐승은 여인의 옆에 엎드려 그녀의 손에 머리를 가까이 가져갔다. 여윈 손가락이 짐승의 털을 기분 좋게 휘저었다.

“날… 잡아먹으러… 온 거지?”

짐승의 검은 눈이 고요히 여인을 응시했다.

“난 알고 있었어…. 내 관심과 애정이, 죽어가던 널 다시 숨 쉬게 만들고 더 크게 만들었어…. 너는 사람의 관심이 없으면 소멸하는 운명이었던 거야…. 그게 너무 슬프고 애처로워 계속 찾아가게 된 거였어…. 끝이 이럴 줄 알았어도… 아마 나는 널 계속 찾았겠지….”

말을 많이 한 탓에 잠시 의식을 잃었을까, 다시 눈을 떠 보니 그 자리에 짐승은 온데간데없고 낯선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 우울한 눈을 보고 여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내 생각이… 맞았나요?”

“그래.”

나지막한 목소리는 사람의 것인 듯도, 아닌 듯도 했다. 마치 저승사자처럼 검은 옷을 두르고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자는 한순간도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네가 없었다면 난 저 산속에서 무(無)로 사라질 뻔했다. 나는 사람의 두려움과 관심을 먹고 사는 존재. 다른 인간들의 수명을 뺏어 널 살려보려 했으나 고작 겨울을 넘기게 하는 게 다였어.”

“왜 그런 짓을…. 어차피 잡아먹을 거면서….”

가쁜 호흡을 하는 여인의 이마에서 젖은 머리칼을 넘겨준 남자는, 이불을 걷어 여윈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고 허벅다리에 앉혀 자신의 몸에 기대게 만들었다.

“산에서 사라졌다는 인간들은 몰래 간음을 하던 처녀, 총각들이었어. 내가 나타나자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다가 발을 헛디디거나 길을 잃고 굶어 죽었다. 네 수명은 죽어 마땅한 것들에게서 뺏어 왔으니 죄책감 갖지 마라.”

“이름 모를 귀신님….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여인의 손이 귀신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뭐지?”

“내가 죽어 묻히게 되면… 가끔 보러 와주세요. 내가 당신을 보러 갔듯이…. 이리 조용히 짧게 살다 가는 것이… 금방 잊혀질까 두려우니….”

“…알겠다.”

다시 여인을 조심스레 눕힌 귀신은 창백해진 뺨을 감싸고 천천히 입을 포갰다. 고통, 의식 모두 자신 안의 어둠 속으로 빨아들이고, 영원한 안식을 선물했다.

다음 날 여인의 집 바깥에는 상을 알리는 조등(弔燈)이 내걸렸다. 그녀를 가장 따르던 여종의 꿈에 저승사자 같은 남자가 나타나, 장례 날짜와 묫자리를 알려주어 그대로 따랐다는 것은 풍문처럼 전해지는 후일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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