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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먼저 씻은 재화가 양주와 잔 2개, 비스킷 하나를 내려놓고 건너편으로 앉았다. 술을 여전히 자주 마시고 있는 것일까? 원래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은 거의 하지 않는 타입이었는데. 재화는 잔을 들어 살짝 입만 축이고 다시 내려놓았다.
“영감은 죽었어.”
충격적인 말이었다.
“뭐라고?”
“위장준. 뇌출혈로 죽었어. 그걸 처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거짓말 같았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장준은 그 나이 또래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었고, 또한 몸에 좋은 것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장준이 죽었다?
“몸에 좋은 걸 먹으면 뭘 하나. 여자, 술, 약. 그런 것들이 몸을 그냥 두지 않았지.”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재화는 딱히 슬퍼하거나, 우울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해성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빈속에 들어가는 술은 식도를 태울 듯 뜨겁게 흘러내려 갔다.
재화는 말없이 잔을 비운 해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병을 내려두자 해성은 팔을 뻗어 잔을 거의 가득 채웠다. 잔을 다시 반쯤 비우고 내려두자 후끈한 기운이 코끝에 느껴졌다.
아직 술기운이 돌려면 좀 더 기다려야겠지만 따뜻한 공기 덕에 금방 취기가 돌아 나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라도 좀 시키는 게 좋겠어.”
수화기를 든 재화가 룸서비스를 신청했다. 그리고 아이스 버킷도 빼놓지 않았다. 결국 신청했던 과일과 치즈 종류가 든 접시가 놓이고 직원이 세팅을 할 때까지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슬슬 마셨던 술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젠 재화를 보는 게 조금은 더 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재화를 대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약간은 초조하고, 불편하기도 하면서도 얼굴을 눈에 담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 앞에 있는 인물이 실존 인물이 맞는지 더 확인하고 싶은 건 자신일지도 몰랐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잠시만요.”
재화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직원에게 팁을 건넸다. 아무 생각 없이 재화의 손을 보고 있던 해성의 눈이 커졌다. 순간 약간 올랐다고 생각했던 취기가 완전히 가시는 느낌이었다.
직원이 나갈 때까지 해성은 재화의 손이 있던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재화는 잔에 얼음을 채웠다.
“그 지갑…….”
“맞아.”
분명 재화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지갑은 분명 해성이 선물했던 그 지갑이었다. 어떻게 그 지갑을 재화가 들고 있는 것일까? 계속 나오던 것도 아니고 그 당시 한정으로 디자인되어 나온 지갑이었다.
“송해성이 내게 처음으로 해주었던 그 선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잖아.”
“못한 척했던 거야.”
“왜?”
“무서웠으니까.”
무서웠다고? 해성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재화를 보았다. 재화는 술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인정할 것 같았거든.”
해성은 재화를 뚫어질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똑바로 받고 있던 재화가 살짝 눈꺼풀을 깔았다.
“내가 송해성을 소유하고, 갖고 싶어 안달하겠구나.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두고 결국은 말려 죽이겠구나.”
손가락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아니,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손끝으로 모여들어 모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너도 나 같은 새끼가 널 좋아하는 건 싫었을 거 아니야.”
고여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해성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괴롭혔어. 그냥, 모든 감정이 교차했어. 어차피 내 것이 되지 못할 바엔 날 기억에서 지우지 못하게 괴롭히기라도 하자. 맞아. 유치했어.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어.”
지금 재화가 하는 말들은 모두가 고백이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고, 상상도 못 했던 것들이라 해성의 뇌는 그 모든 정보를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저 입만 살짝 벌린 채 재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재화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해성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송해성이 점점 더 좋아져서, 더 빠져들까 봐 무서웠거든. 그래서 안지 않으려고 했어.”
해성은 그저 말없이 재화를 바라보았다.
“유학 중엔 다른 여자도 만나봤어. 절대 송해성을 여자로 봐선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재화의 손가락 끝이 아주 미세하기 떨리는 게 보였다. 해성은 재화의 손을 계속 바라보았다. 늘 뱉는 말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손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내 침실을 그렇게 나뒹굴던 건 내가 아니었어. 물론 착각을 하게 둔 건 사실이야. 그냥 날 인간 이하로 보길 원했던 것도 있으니까. 알아, 모순이지. 그러면서 네게 그 어떤 남자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으니까. 타고나길 원래 욕심이 많은 빌어먹을 새끼인 걸 어쩌겠어.”
스스로를 후려치듯 재화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냉정했다.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해성을 보고 놀란 재화도 그대로 일어섰다.
잠시 해성의 앞을 막았던 재화가 스스로를 자책하듯 눈가를 가리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미안. 다신 무엇인가를 강제적으로 할 생각은 없어. 그저 나 같은 놈이 계속 널 괴롭혀서 미안했다고, 네 인생을 뒤흔들어서 미안했다고 그저 사과를 하고 싶었어.”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는 재화의 손등은 뼈 모양이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신경을 썼을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재화를 아주 오래 보아왔다. 원래도 마른 체질인 재화는 조금만 신경이 쓰이는 일이 생겨도 살이 금세 빠지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제껏 그 어느 때보다도 말라 있었다. 셔츠 하나만을 걸치고 있어 그게 더 고스란히 느껴졌다.
“재화 넌…….”
재화가 해성의 목소리에 손을 내렸다.
“네가 싫다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게.”
자신이 없는 것처럼 꺾인 목소리였다.
“그건 싫어.”
잘못 들은 것처럼 재화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이내 그 말뜻을 이해한 듯 해성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허리께를 잡고 자신의 몸쪽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닿은 곳에서부터 전기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해성은 두 손을 올려 재화의 볼을 감쌌다. 그리고 그 붉은 입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 괴롭히게 해줘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