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막 잔으로 가져가려던 손이 그대로 공중에서 멈췄다. 도무지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해성을 보며 재화는 그저 낮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안지 말았어야 했는데.”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해성의 큰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재화는 입꼬리 끝에 힘을 주며 살짝 올렸다.
“반성하고 있다는 뜻이야.”
눈동자가 흔들렸다. 해성은 고개를 돌리고 재화의 말뜻을 해석하기 위해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습기 없는 모래들이 잔뜩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뭉치지 못하고 단어들은 흩어지기만 했다.
“다시 널 되찾겠다고, 온 것도 아니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군가가 가슴을 쥔 채 고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맥박은 멋대로 널을 뛰는 것 같았고 호흡을 조절하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마치 100m 달리기를 있는 힘껏 하고 난 뒤의 상태인 것 같았다.
“이 나라가 이렇게 넓은 줄은 몰랐네. 흔적이 없으니 아예 찾지 못할 줄도 몰랐어.”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건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재화는 남 의원의 딸과 약혼을 준비한다고 했고, 그냥 해성은 재화에게 있어 소모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수족같이 부리던 계집애가 사라져 화를 내겠지만 그것도 잠깐일 것이라 생각했다.
“꼬박 10개월이나 걸렸네.”
“날…… 찾았어?”
해성의 물음에 오히려 재화가 놀란 것 같았다.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해성의 물음에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럼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냥, 너에게 난 계륵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거든. 갖기도 그렇지만 남 주기엔 또 아쉬운.”
“그럴 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재화가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예상외였다. 재화에게 그래도 자신이 꽤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내게 송해성은…….”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쿠키가 기분이 좋은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해성에게로 뛰어왔다. 이어서 들어오던 지우가 놀란 듯했다. 이제껏 해성을 찾아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이렇게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아 있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어? 손님 오셨어?”
“어. 그게…….”
해성은 어떻게 재화를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지만 딱히 재화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짝사랑하던 남자도 동창이라고 말을 한 것 외엔 지우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때 재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명함을 꺼내 지우에게로 내밀었다. 지우는 재화의 얼굴에서 눈도 떼지 못하면서 명함을 받아들었다.
“위재화입니다. 해성이가 회사에 있을 때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네? 아, 네. 저는 해성이랑 같이 카페 운영하는 맹지우라고 합니다.”
당황해서인지 지우는 평소보다 훨씬 사투리 억양이 심하게 나왔다. 얼굴에서 계속 눈을 떼지 못하는 지우 때문에 재화도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우야, 미안. 잠깐 자리 좀 비울게.”
“어? 어, 그냥 퇴근해. 괜찮아. 오늘 손님도 없는데 뭘.”
“이따 연락할게.”
서둘러 해성이 입고 왔던 패딩을 걸치고 재화를 보았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네? 네. 안녕히 가세요.”
여전히 고개를 든 채로 재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엉거주춤 인사를 하는 지우를 보고 웃으며 해성이 카페 밖으로 나왔다. 재화도 곧 그녀를 따라 나왔다.
이곳은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골목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재화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오래 밖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따뜻한 롱패딩을 입고 있어도 추운데 상대적으로 훨씬 가벼운 차림의 재화는 무척이나 추울 것이다.
이 근처는 애석하게도 이야기를 나눌 카페는 없었다. 적어도 100m 이상은 걸어 나가서 큰 도로를 건너야 했다.
“차는?”
“근처 공용주차장.”
“춥지 않아?”
“추워.”
“그럼 일단 주차장으로 가자.”
이 날씨에 그렇게 많이 걷는다는 건 못 할 짓이었다. 이곳에서 공용주차장은 10m밖에 되지 않았다. 바로 옆으로 꺾어 주차장으로 가자 재화가 픽 웃었다.
“지름길이 있었군.”
잠시 고개를 돌렸다. 재화의 커다란 손이 추위 때문에 빨갛게 변해있었다. 해성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평일이고 오늘 워낙 추워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평소엔 빡빡하게 차 있는 주차장은 한산했다. 그리고 잠시 멈칫했다. 익숙한 차, 익숙한 번호. 그건 해성이 전에 타고 다니던 차였다.
재화는 바로 차 앞으로 걸어가 보조석 문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친절을 베푸는 재화는 어색했다. 하지만 일단은 바로 차에 올라탔다. 문을 닫은 재화가 빠르게 운전석으로 걸어와 시동을 걸고 시트 열선 버튼을 눌렀다.
“여긴 내가 아는 곳이 없는데 내가 아는 곳으로 가도 될까?”
재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장준의 경고 때문에 최대한 몸을 사렸던 해성으로선 아는 곳도 한정적이었다. 처음에 카페도 정말 지내고 있는 원룸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들렀던 곳이고, 해변에 나갈 때도 선글라스를 끼는 걸 잊지 않았다.
생각에 여러 빠져있는데 문득 앞치마를 그대로 하고 왔다는 게 보였다. 앞치마를 벗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는데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차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부산 톨게이트가 나왔다. 물론 마산에서 약 한 시간 거리로 가까운 곳이긴 했지만 부산까지 올 줄은 몰랐다.
고개를 돌려 재화를 보았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재화도 어딘지 살짝 멍한 얼굴이었다. 정말 아는 곳이 없어 부산까지 왔다는 것을 분위기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평일에 낮 시간대라 도로는 밀리지 않았다. 곧 재화가 운전하고 있는 차는 해운대로 들어섰다. 이곳은 해성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처음 장준이 구해 준 아파트도 이곳에 있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아직 아파트는 처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차는 해운대를 보고 있는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재화의 뒤를 따랐을 땐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신경 쓰이면 라운지로 가도 괜찮고.”
“괜찮아.”
결국 차분히 앉아 두 사람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스위트룸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창으로 보이는 건 넓게 펼쳐진 바다였다.
“편하게 앉아.”
재킷을 벗으며 말하는 재화를 보고 잠시 고민하다 식탁이 나을 것 같아 그 앞으로 앉았다. 고개를 오른편으로 돌리니 바다의 모습이 한눈에 박혀 들었다.
툭, 툭.
날이 흐리다 싶더니 이내 빗방울이 창문에 떨어지며 나는 소리였다.
“커피는 좀 그렇고, 술도 별로려나?”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