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롭히게 해줘-38화 (38/40)

-38

“알았어. 밥 먹고 오늘은 딱 호떡 하나만 사 올게.”

손을 씻은 해성이 허락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추우니까 목도리랑 잘하고 가.”

“가만 보면 우리 엄마보다 잔소리가 아주 더해.”

그러면서도 지우는 해성의 말을 듣고 목도리까지 단단하게 두르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꺅, 추워.’를 외치며 곧 쿠키와 함께 사라졌다.

지우의 말처럼 오늘은 정말 장사가 되지 않는 날인 모양이었다. 점심을 먹고 손님이 조금은 몰려들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20분이나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다.

여름, 가을을 넘어 겨울이 되면서 해성은 지우와 더 많이 친해졌다. 해성의 출신을 알게 된 지우는 이런 고급인력을 싸게 부려도 되는 거냐며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게다가 지우의 부모님은 정말 딸처럼 반겨주었다. 덕분에 지금은 작은 원룸 생활을 정리하고 지우와 함께 살고 있는 중이었다.

해성도 서울에 있을 때보다는 2, 3kg 정도가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마른 체형이라 태도 나지 않았지만 여느 때보다 마음이 편한 건 사실이었다. 어느 날은 한 번씩 재화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우연히 민혁의 결혼식 기사 사진이 뜬 걸 보았다. 민혁과 악수를 하고 있는 키가 큰 남자의 얼굴은 블러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한눈에 재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sns로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들도 볼 수 있었다.

비록 화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움직이는 재화의 모습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모델이냐고 물을 정도였고, 확실히 그렇게 보일 정도로 옷걸이가 좋아 보였지만 얼굴엔 지방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요즘은 그래도 생각하는 게 많이 줄었지만 이렇게 한 번씩 떠오를 때면 우울해지곤 했다. 이런 우울함을 떨치려 사실은 지우가 함께 살자며 조른 것에 응한 것도 있었다.

정신을 차린 해성은 에스프레소 샷을 내렸다. 오늘 일어나 커피를 마시지 못해서 괜한 상념에 젖어 있는 것뿐이었다. 뜨거운 물을 받아 샷을 부은 뒤 잘 떠 있는 크레마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산은 원래 눈이 잘 오지 않았고 오늘은 습하기에 비라도 오는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보통 습하면 원두도 수분을 머금어 빡빡하게 커피가 내려질 때도 있었다. 한 모금 마셔보니 다행히 평소와 같은 맛이었다.

머신을 정리하는데 손님이 들어오는지 딸랑, 문에 걸어 놓은 풍경의 맑은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바스킷을 끼우고 돌아섰다.

“어서 오세요.”

웃으며 인사를 하던 해성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큰 키에 넓은 어깨, 마른 체형. 늘 지우려고 생각했던, 앞으로 평생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서 있었다.

아직 열린 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훅, 스쳐 들어와 짧아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딸랑.

문이 닫히며 다시 풍경소리가 울렸다. 들고 있던 머그가 자꾸만 손가락에서 미끄러지는 것만 같았다. 이러다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내려놓는 순간 긴 다리를 이용해 재화가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왔다.

재화의 큰 눈동자가 해성의 모습을 살폈다. 예전과 다르게 어깨선이 드러날 정도로 짧아진 머리카락에, 쇄골이 살짝 드러나는 V넥 니트, 앞치마 차림의 해성은 훨씬 활기차 보였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처럼 보였다. 자신의 옆에 있을 때보다 얼굴색도 밝고 생기가 있었다.

딸랑.

다시 문이 열리며 손님들이 들어왔다. 한 번씩 들르곤 하는 근처에 있는 식당의 직원들이었다. 계산대 앞에 평균보다도 훨씬 키가 큰 재화를 보고 직원들이 놀란 것 같았다.

“먼저 주문하십시오.”

재화가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거의 1년 만에 듣는 재화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낮고, 정중하고, 느긋했다. 해성은 가까스로 웃으며 주문을 받았다. 지금 제대로 웃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인식이 되지 않았다.

뒤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등 뒤로 재화의 시선이 고스란히 꽂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커피 메뉴는 아니었지만 요거트 스무디를 만드는 중에도 손가락이 조금씩 떨려 파우더를 흘려야만 했다.

평소엔 도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잘만 용기에 담았는데 오늘은 그것도 불가능했다. 자꾸 손바닥에 땀이 차 놓칠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두 잔을 만들어 앞으로 건네주었다.

“언니, 오늘 회식하는 거 맞아요? 지우 언니가 오늘 우리 식당에서 회식한다고 하던데.”

“어?”

“우리 매니저 오빠 언니 오기만 엄청 기다리잖아요. 하여간 올라갈 나무를 쳐다봐야지. 암튼 오늘 꼭 와요. 언니 오면 우리 야식 메뉴가 달라지잖아요.”

“언니, 수고해요.”

식당의 직원들이 꺄르르 웃으며 카페에서 나갔다. 이젠 이 카페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하필 그 순간 잘 흘러나오던 노래도 끝이 났다. 그 순간적인 정적이 숨이 막힐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도 한 잔 줘.”

아예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아주 우연이라도 재화를 만나게 된다면? 해성은 바로 재화의 손에 이끌려 끌려갈 거라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처럼 스쳐 지나가거나.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아니라 재화는 꼭 어제 보았다 다시 만난 것처럼 행동했다.

고개를 끄덕인 해성이 몸을 돌렸다. 에스프레소를 내리는데 다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능숙해 보이네. 난 라떼로 줘. 메이플 시럽 한 번 넣어서.”

재화는 텁텁한 맛 때문에 우유가 들어가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입맛이 바뀐 것인지, 그녀를 시험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메이플 시럽을 한 번 펌핑하고 우유를 스팀했다. 차분한 목소리 덕분인지 긴장이 풀려 평소처럼 커피를 만들 수 있었다.

뒤로 돌아서자 재화는 이미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러시안블루인 가을이가 이미 다가와 재화의 허벅지 위로 올라와 있었다. 재화는 손가락으로 가을이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 안쪽에서 나온 해성이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커피 두 잔을 나란히 두고 마주 보고 앉았지만 왠지 재화의 얼굴을 볼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오늘은 평일이었고, 별다른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슈트 차림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재화는 편해 보이는 슬랙스에 셔츠, 블루종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오늘은 회사를 나가지 않고 해성을 만나기 위해 내려왔다는 말이었다.

가을이의 고릉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재화의 손길이나 허벅지 위가 편한 모양이었다. 원래 사람 손에서 길러지다 버려진 가을이는 애교도 많았고 사람들을 좋아했다. 주인이 남자였는지 손님들 중에서도 남자들을 유난히 좋아했었다.

“얼굴 좋아 보이네.”

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목이 메어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시선을 계속 마주치지 못하고 여전히 재화의 허벅지 위에 앉아있는 가을이만 바라보았다.

“하긴, 회사 생활이 편한 건 아니었지.”

그 말에 해성이 고개를 들었다. 재화의 입매는 살짝 비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화가 났다거나, 심통이 난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앞에 해성을 두고 있는 게 현실인지 아닌지 스스로 의심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제일 개 같이 굴었으려나?”

자조적인 말투를 뱉으며 재화가 손을 뻗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재화는 해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눈길이었다. 늘 재화가 바라볼 때면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눈이 커서인지 유난히 눈동자가 큰 재화였다. 살짝 가늘게 눈을 뜨고 사람을 바라볼 때면 꼭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눈도 아니었다. 정말 해성은 재화를 만나고 처음 보는 눈빛을 마주했다.

“언젠간 놔줘야지 생각은 했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