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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내일이 주주총횝니다. 긴말하지 않죠. 송해성, 어딨습니까?”
입에 못질이라도 해 놓은 듯 장준은 입을 열지 않았다.
“허울뿐인 회장직이라도 유지하고 싶으시면 조금이라도 빨리 말씀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제가 인내심이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라서요.”
말이 아버지지 장준이 그동안 제대로 아버지 노릇을 한 적이 있었던가. 심심할 때마다 여자를 바꾸고 재화의 친모와도 잔인하게 찢어놓았다. 친모가 병들어 죽을 때까지도 재화 얼굴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라는 말도 무시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장준보다 재화와 더 나이 차이가 나지가 않는 여자들을 데려와 어머니라 부르라더니. 그 여자들이 뒤에서 재화에게 몸뚱어리를 들이밀던 것도 모르고.
장준은 재화가 다 좋으나 여자를 품지 않는 것에 불만을 터트렸다. 정말 남색 취미가 있냐며 의심까지 했고. 결국 재화는 해성을 처음에 안지는 않았지만 거의 섹스에 가까운 행위를 했다. 그 뒤로 장준에게 그 이야기가 들어가고 한참 동안 여자 문제로 재화를 괴롭히지 않았다.
유학을 가면서 장준의 시야에서 벗어났지만 귀국을 하고선 다시 간섭이 시작되었다. 장준은 이상한 성적 욕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으레 남자라면 당연히 많은 여자를 거느려야 한다는. 그러니 접대를 받는 자리에 아들을 데려가 그렇게 거리낌 없이 보여주지 않았던가.
독립을 한 이유는 장준의 그런 쓰레기 같은 사상에서 벗어나기 위함도 있었지만 조금 더 느슨하게 감시에 당해주기 위해서였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의 그런 문란한 짓들만 보고 자라와서 그런지 딱히 섹스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은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장소를 제공했을 뿐이다.
약을 하는 인물들은 지위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철저히 비밀이 유지될 수 있는 장소를 선호했다. 아무래도 민혁의 호텔보다는 재화가 제공하는 펜트하우스가 더 좋았을 것이다.
해성에게 침실을 처리하라 일러둔 것도 당연히 장준의 귀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위해서였다. 여자를 한 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게 장준처럼 짐승처럼 구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어쩌면 처음 해성을 안게 되었을 때 본능적으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간 놓아주어야 하는데 한번 안고 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될 것을.
어쩌면 무서웠던 것이다. 안으면 안을수록 빠져드는 것이 느껴졌다. 사랑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을 정도라 아무리 안아도 부족할 정도였다. 송해성이 없이 살 자신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해성이 떠난다면 절대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해서 더 깊게 빠져드는 게 두려웠다.
언제부터 정확히 해성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는 모른다. 그냥 옆에 있는 게 당연한 존재라고. 하지만 자신에겐 보여주지 않던 자연스러움과 환히 웃던 모습을 민혁에게 보였을 땐 가슴에서 불같은 질투가 솟아올랐다. 그때도 마음을 부정했다. 아닐 거라고,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일부러 더 차갑게 말을 뱉고, 공사의 구분을 확실히 했다. 그런 확실한 선 긋기에 안심하는 자신과 함께 낙담하는 자신이 공존했다. 결국은 강한 부정이 긍정이었던 것이다.
“여자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해.”
장준의 말에 재화는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장준의 말에 웃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여자를 거느리셨어요? 제 어머니에 이은 제 이모까지?”
그 말에 이제껏 반쯤 멍해져 있던 장준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송해성 부모가 원래부터 쓰레기라 그런 건 다 차치하고 왜 그러셨어요.”
“뭘?”
“아버지가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더라면 전 제 감정 죽이면서 그냥 송해성 바라보기만 했을 거예요.”
“지금 내가 부추겨서 이렇게 되었단 말이냐?”
재화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사실 해성은 넘봐서도 안 될 존재라고 생각했다. 처음 눈이 마주쳤던 그날, 그 태풍이 불던 날. 재화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정말 그저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맛만 보지 않으면 된다고. 아마 그렇게 스스로에게 계속 세뇌를 걸었을 것이다.
“그깟 여자애 하나 때문에 지금 애비도 버리고, 콩가루를 만들겠다?”
“언젠 콩가루 집안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 그리고 그깟? 금화 토건을 여기까지 올린 게 누구 덕인데. 말은 바로 하셨어야죠. 구속의 양갈래에서 구해준 것도 해성인데.”
유학 시절 뇌물수수 혐의로 장준이 지목되었다. 그때 해성이 인맥을 이용해 상대측 야당 의원을 지목해 장준이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그 사건 하나만으로도 해성은 제 몫을 모두 해내고도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준은 해성을 써먹을 수 있는 데까지 마치 모든 골수를 빨아들이듯 쓴 것이다.
주먹을 쥐고 있는 장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다 못해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눈이 풀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회, 회장님!”
“회장님!”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과거 시절의 잔재들인 인물들이 회장이랍시고 장준을 챙기기 시작했다. 재화의 시선이 안절부절못하는 장준의 비서에게로 꽂혔다. 결국 비서는 재화에게 장준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해제해 건넸다.
*
오늘따라 유난히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원래 바닷가의 바람이 훨씬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롱 패딩을 입었음에도 차가운 바람이 뼛속을 가를 듯이 파고들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늘도 역시 쿠키가 반갑게 그녀를 반겼다.
“왔어? 나 오늘 오전에 몇 잔 팔았게.”
“얼마나 팔았는데?”
“두 잔. 말이 돼?”
“그럴 만도 해. 밖에 아예 사람이 안 다녀. 진짜 춥다.”
쿠키를 몇 번이나 쓰다듬으며 말하는 해성을 보고 지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오고 계속 장사 잘되다가 오늘 안 되니까 좀 이상해서 그렇지.”
“그게 뭐 내 덕인가? 우리 사장님 손맛 덕분이지.”
“오늘 또 뭐가 먹고 싶어가지고 그렇게 아부를 떠실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우리도 문 닫고 어디 찜질방이나 갈래?”
“안 돼. 개인 카페에서 제일 중요하게 지켜야 할 건 시간 약속이야.”
“진짜 누가 사장인지 모르겠네. 나가서 군것질 거리 좀 사 올게. 밥은 안 당기고 그런 거 먹고 싶다. 쿠키야, 산책 가자.”
산책이라는 말에 해성의 손길을 받던 쿠키가 벌떡 일어나며 하네스가 걸려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해성은 패딩을 벗어 걸어두고 앞치마를 입었다.
“괜히 군것질만 더 하지 말고 밥 먹고 사 와.”
“에이, 너무 빡빡하게 구신다.”
“살쪘다고 난리잖아.”
확실히 여름에 비해 7kg이나 찌면서 지우의 얼굴이 동그래졌다. 다이어트를 한다면서도 자꾸 넘치는 식욕을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 해성이 온 뒤로 마음이 편해져서 찐 살이라면서도 지우도 나름 노력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