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롭히게 해줘-36화 (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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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죄송합니다.”

“그래서 영감이 뭐랬습니까?”

“피임기구를 삽입하거나, 혹시라도 임신이라면 수술 준비를 하라고…….”

거의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장 박사가 고개를 숙였다. 하, 낮게 숨을 뱉으며 재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나나 내 주위에 대해 관련된 모든 건 유출 금지합니다.”

“네.”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장 박사를 서늘하게 바라본 재화가 원장실을 빠져나왔다. 재킷을 똑바로 잡아당겨 바로 해 단추를 잠그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울려 꺼내자 안 비서였다.

“여보세요.”

[메시지 넣어드렸습니다. 이현아라고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현아?”

[현재 SH기획사 실장으로 있고, 송 과장님의 친한 친구라고 합니다.]

재화가 재빨리 생각을 더듬었다. 이제 기억났다. 촉새라고 불리며 늘 말이 많던 동창이었다. 몇 번인가 해성의 옆에서 쫑알거리던 기억이 있는데 친하게 지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끊어요.”

통화를 종료한 뒤 바로 메시지를 보았다. 현아가 있는 주소를 확인한 재화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들었다.

기획사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카운터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오셨는지…….”

“이현아 실장 있습니까?”

“계시긴 한데 약속하셨습니까?”

“금화 토건 위재화라고 알려주십시오.”

“네? 네. 여보세요? 실장님 금화 토건 위재화 님이라고 하시는데요. 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직원이 재빨리 카운터에서 빠져나왔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때 밖이 시끌벅적하더니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남자들이 들어왔다. 들어오면서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재화를 위아래로 훑었다.

“모델? 배우? 우리도 이제 제대로 배우판 깔아요?”

“손님이야. 이쪽으로 오시죠.”

메이크업이 짙은 남자들은 자세히 보니 요즘 인기가 많다며 티비에 나오는 아이돌들이었다. 다들 그럭저럭 얼굴도 작고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편이었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올라가는데도 시선이 느껴졌다.

재화는 친절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갑작스러운 재화의 행동에 모두 놀란 얼굴이었다. 명함을 돌린 재화는 픽 웃었다.

“또 뵙죠.”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직원은 재화를 향해 앞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GF 엔지니어링? 대박, 전무?”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시끄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 지을 공연문화센터에 요즘 인기가 좋은 아이돌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현아에게 꽤 큰 계약 건을 던져주면 당연히 해성에 대한 어떠한 흔적이라도 찾기는 편할 것이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놀란 얼굴이 역력한 현아가 재화를 맞이했다.

“허, 내가 살다가 위재화를 내 사무실에서 다 만나보네. 와, 너 하나도 안 변했다? 아니. 더 잘생겨지긴 했네.”

“뭐, 넌 그대로네.”

먼저 테이블 앞으로 가서 앉는데 현아는 여전히 놀란 얼굴을 지우지 못하고 재화의 앞으로 앉았다. 꼭 TV에서나 보던 인물을 보는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연예인 해도 단번에 뜨겠는데. 이런 인물이 어떻게 지하에서 썩고 있지?”

“지하?”

“말이 회사지 너희 집 깡패 집안이잖아.”

이건 겁이 없는 건지, 동창이라는 빽을 믿고 이러는 건지. 기가 차 재화는 픽 웃으며 다리를 꼬고 앉아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송해성.”

“해성이가 뭐?”

“연락처.”

“뭔 개소리야.”

“내놔.”

“나야말로 묻자. 대체 해성이 어디로 숨긴 건데? 전화는 없는 번호라고 뜨고, 집을 찾아가도 아무도 없고. 진짜 너 뭐냐?”

“6개월간 이현아한테까지 연락 없다는 거 안 믿어.”

그 말에 현아가 크게 날뛰었다. 마치 재화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멱살을 잡기까지 했다. 재화는 쉽게 현아의 손을 치워냈다. 그 밀리는 힘에 휘청이며 현아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갑자기 해외로 출장 간다더라. 좀 길게. 4개월쯤은 연락 안 될 수도 있다고. 그런데 이게 뭐야? 무슨 일인데 대체 위재화까지 나서서 날 찾아오는 건데. 내가 너희 회사 쳐들어갔을 땐 깡패 새끼들 이용해서 아주 내팽개치더니!”

“무슨 소리야?”

“뭔 소리긴? 말 그대로지!”

재화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분명 장준의 짓이 틀림없었다.

“송해성에게 연락 오면 바로 연락 줘.”

명함을 꺼내 그 뒤에 개인 연락처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현아는 기가 막힌 얼굴로 명함을 받아들며 재화를 노려보았다.

“야, 위재화. 너 대체 뭔데? 무슨 짓 한 건데.”

“그러게. 내가 무슨 짓을 했을까.”

자조적인 말투를 뱉으며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재화의 입매가 비틀렸다.

#11.

집 안은 신발을 신지 않고는 돌아다닐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깨부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말짱한 것이 없었다. 재화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들고 있던 골프채를 툭 던지고는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입을 다문 채 장준은 소파에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겨울이 올 때까지 멍청하게 가만히 앉아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주식을 모으고 이사진들까지 끌어들였다.

이미 장준의 경영 능력은 너무 구닥다리고 어쩔 수 없는 깡패의 피는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보다 제대로 된 대학을 나오고, 안정적이면서도 성공적으로 사업을 계속 정상의 궤도를 달리게 하는 재화를 지지하는 힘이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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