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롭히게 해줘-33화 (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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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를 내려두고 일어나려는데 재화에게 손목이 잡혔다. 그리고 순식간에 재화의 허벅지 위로 올라타게 되었다.

“어디서 배웠어?”

“뭘?”

“남자 허리 위에 올라타서 그렇게 움직이는 거.”

소파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어 고개까지 살짝 젖힌 재화가 젖어 있는 붉은 입술로 물었다. 해성은 눈꺼풀만 내리깐 채 무릎에 힘을 주고 재화의 허벅지에 다리 사이를 슬쩍 문질렀다.

“송해성은 섹스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왜?”

“늘 내 방을 경멸하듯 바라봤잖아. 아무리 내가 다른 새끼랑 떡을 치지 말랬다고 정말 안 할 줄도 몰랐고. 이럴 줄 알았음 처음에 그냥 할 걸 그랬나?”

얇은 셔츠만 입고 있는 허리께를 엄지로 슬쩍슬쩍 문지르자 그게 배를 타고 내려가 다시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게 만들었다. 생리 중 성적 자극을 받으면 자궁 수축으로 인해 생리통이 더 심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분위기가 주는 느낌에 거부를 할 수도 없었다.

“송해성.”

자신의 손가락에 시선을 둔 채 재화가 해성을 불렀다. 긴 검지를 마치 낙서를 하듯 해성의 납작한 배 위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참아내기 위해 해성은 그저 볼 안쪽 살을 슬쩍 깨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널 버린 부모가 보고 싶다거나.”

“없어.”

단호하게 말했다. 부모는 불모로 해성을 금화 토건에 던져주고 사라졌다. 자식을 그깟 빚에 그리 쉽게 넘기는 부모가 제대로 된 부모일 리가 없다.

“좋은 부모였다며.”

“풍족할 땐 누구나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있어.”

적어도 금화 토건에 들어와 한 1년 정도는 희망을 품었던 것도 같다. 곧 부모님이 돌아와 빚을 갚고 자신을 구해줄 거라고. 하지만 장준과 완섭이 어느 날 대화하는 것을 듣고 그 일말의 희망도 산산조각 부서졌다.

“필리핀에서 완전히 종적 감췄답니다. 딸년은 완전히 포기한답니다.”

“시발, 돈 앞에 자식새끼는 안중에도 없구만. 새끼는 또 낳으면 된다는 거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어쩌면 버려지는 그 순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거대한 한남동 저택 앞에 그녀를 둘 때도 부모님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건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착하게 있으라 말하고 바로 사라졌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다시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은?”

“우연이라도 다시 보지 말자고나 해야 할까?”

재화는 해성을 몸에서 일으켜 옆에 앉게 만들었다.

“송해성.”

낮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뭐 할 말 없어?”

“없는데.”

“늘 그렇지.”

대화의 의중을 알지 못해 해성은 그저 멍한 눈으로 재화를 내려보았다.

“늘 궁금한 건 나뿐이잖아.”

이해하기 힘들었다. 딱히 재화가 자신이 하는 것에 대해 궁금해 한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때 해성을 위에서 내리게 만들고 자신의 다리 사이로 앉게 만들어 앞을 보게 만들었다.

그녀의 어깨에 턱을 대고 기댄 재화에게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그때 눈앞으로 무엇인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고개를 드니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있었다. 뭔가 싶었는데 살짝 상체를 떼어 낸 재화가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걸었다.

“이건 뭔데?”

“개 목줄?”

나른한 건지 재화의 살짝 풀린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개 목줄이라. 해성은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어차피 이제 다음 달이면 당장 금화 토건에서 벗어난다. 아마 재화는 해성이 영원히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녀가 사라진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남자지만. 그저 입 안의 혀처럼 굴던 노예 하나를 잃는 느낌이려나.

재화는 두 팔로 해성을 감싸며 틈이 없게 만들었다. 그 따뜻한 온기에 잔뜩 곤두서 있던 긴장감이 풀리며 해성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10.

해변에 앉은 해성은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보았다. 이름도, 연락도 없이 그저 주소가 적힌 것뿐이었다.

“정리가 빠르네. 그렇게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그동안 꽤 욕 좀 했겠어. 우리 송 과장이.”

주변을 정리해도 한 달쯤이라고 예상했던 장준의 생각과 다르게 해성은 거의 일주일 만에 끝냈다. 늘 그렇듯 빠른 일 처리에 감탄했다는 듯 장준은 박수까지 쳐주었다. 마지막으로 장준에게 인사를 할 때 해성은 거의 90도 각도로 깍듯이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한남동에 들러 길 여사나 영화에게 선물도 주고 긴 인연을 끝냈다. 물론 그 둘은 그게 마지막 인사인 줄은 몰랐겠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소연의 남자를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끝난 인연이니 더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복잡한 감정은 여러 가지로 교차했다. 바닷바람에 팔랑거리던 종이가 이내 휩쓸려 날아갔다. 몇 번인가 모래사장을 나뒹굴다 이내 바닷물에 쓸렸다.

어느 정도 대충 예상은 할 수 있었다. 그 주소가 적힌 종이는 해성이 마지막 출근을 했을 때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괜히 재화가 부모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생의 반 이상을 이미 금화 토건의 사람으로 살았다. 부모란 존재는 그저 낳아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제 와 찾아 무엇을 하겠는가. 빚은 이미 다 갚았고, 오히려 충분한 포상까지 받고 끝이 났다. 이제 해성은 말 그대로 자유가 되었다. 비록 인간의 존엄성이나, 상처까지는 지울 수 없는 상흔처럼 남았지만.

어느새 여름이 찾아왔다. 해변은 말 그대로 관광객들과 피서를 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해성은 그 사이에서 꼭 이방인처럼 선글라스를 낀 채 긴 팔에, 긴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금화 토건에 들어온 뒤로 여유를 부려 본 것은 해방이 되던 첫날이 처음이었다. 벌써 6개월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다. 눈을 뜨면 그게 아침이었고, 잠이 들면 그게 밤이었다. 달은 어느덧 해성에게 태양이 되었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이렇게 쉬는 것도 이골이 났다. 얼마 전 자주 가던 작은 개인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됐다. 바로 집 앞에 있어 자주 갔던 것뿐이었다. 테이블이 건물 내부 안에 네 개, 테라스 공간에 하나밖에 없는 작은 규모였지만 커피 맛이 좋았다. 일어나서 꼭 커피를 마시는 건 해성에겐 일종의 버릇 같은 것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침대 그 이상의 것이 없었다. 언제든 주거를 옮길 수 있도록 많은 짐들은 두지 않았다. 작은 캡슐 커피머신이라도 살까 했지만 그건 제대로 된 커피머신이 아니면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았다.

몇 달째 규칙적인 시간 없이 카페에 들르는 해성에게 카페 주인인 지우는 관심을 보여왔다. 사람과 빠르게 친해지는 일이 드물어 해성과 지우가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를 하게 된 건 3개월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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