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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은 가까스로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얼굴로 물컵을 가져가 대며 열을 식혔다. 가방에서 팩트를 꺼내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홍조가 쉽게 가실 것 같지 않아 몇 번이나 파우더를 꾹꾹 눌러 발랐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갈 때쯤 손님이 오셨다는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보는 시화는 여전했다. 아직 다리 사이의 위화감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해성은 반갑게 웃으며 팔을 뻗는 시화를 반겨주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우리 해성이는 왜 이렇게 더 예뻐졌어? 그런데 살이 너무 많이 빠진 거 아니야?”
“몸살감기 때문에 좀 아팠어요. 이제 괜찮아요.”
“어휴, 진짜 많이 먹어야겠네. 재화가 대체 얼마나 부려 먹는 거야? 이 자식 자기는 일 안 하고 너만 다 부려 먹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때 문이 열리며 페이퍼타올에 손을 닦으며 들어오는 재화가 보였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재화는 저 손으로 그녀의 몸을 헤집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재화야!”
시화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재화의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어려서부터 시화는 워낙 감정 표현에 솔직했다. 그래서 예술가로 잘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거 봐라? 위재화. 너 요즘 혼자 뭐 좋은 거 먹냐? 몸은 또 왜 이렇게 좋아졌어?”
“손은 좀 놓고 말해. 무슨 일이야?”
“너는 꼭 오랜만에 보는 누나 좀 더 반길 순 없냐? 무슨 인간이 이렇게 재미가 없어.”
구시렁거리며 재화의 자리에 앉은 시화는 대충 물티슈에 손을 닦고는 산적을 손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 하늘에서 먹는 밥보다 식당 밥이 최고다.”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시화는 한참 동안 음식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재화는 자연스럽게 해성의 자리 옆으로 앉았다. 해성은 시화가 더 먹을 수 있게 음식들을 놓아주었다.
“송해성. 신경 쓰지 말고 너나 먹어.”
낮은 재화의 목소리에 시화가 올,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너 유정이하고 만난다며?”
순간 나온 유정이라는 이름에 해성의 어깨가 슬쩍 움츠러들었다.
“소문도 빠르네.”
“아버지가 그렇게 네 상대에 공을 들이더니 결국은 자리 주선했네?”
“아는 사이야?”
“그럼. 우리 학교 후배잖아.”
두 사람 모두 같은 계열에 있었으니 선후배라고 하는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같은 학교를 나왔을 줄은 몰랐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바로 유정에 대해 조사를 했겠지만 해성은 그럴 시간도 없었고, 이제 그래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나저나 나는 두 사람이 결혼할 줄 알았더니?”
시화의 갑작스러운 폭탄에 해성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 해성의 모습에 시화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화 너 뭐 아직도 비밀이었어?”
“비밀은 무슨.”
심드렁하게 답하는 재화를 슬쩍 돌아보았다.
“재화 첫사랑이 해성이 너잖아.”
#09.
그 말에도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해성이나 재화를 보고 시화는 재미없다는 표정을 했다.
“하여간 얘네들은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네.”
“누난 갑자기 왜 들어왔는데.”
“내가 들어오는데 뭐 이유가 있어야 하니? 그냥 겸사겸사, 곧 전시회도 서울에서 하려고.”
처음엔 워낙 집안 힘으로 명성을 얻었다는 데에 시화의 작품은 호불호가 갈렸다. 평론가들의 평은 물론 좋았지만 그것도 집안에서 돈을 먹였다는 말이 많았다. 개중엔 원래 백그라운드가 받쳐줘야 예술을 한다는 말도 많았다.
워낙 긍정적이고 엉뚱한 시화는 남들이 뭐라 떠들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집안과 크게 영향 없이 그저 ‘위시화 작가.’라는 네임벨류 하나로 스케줄이 빡빡했다.
“그래, 우리 해성이는 남자친구는 좀 생겼어?”
“아뇨.”
“이렇게 예쁜데 왜 남자친구가 없을까. 회사에 남자들도 많잖아. 회사 인간들은 뭐 눈이 다 삐었니?”
예전부터 시화는 늘 해성을 보고 예쁘다고 해주었다. 여전히 시화의 눈엔 해성이 예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인연을 끊게 되면 시화와도 더 이상은 만나거나 연락을 할 수 없다는 게 아쉽기는 했다.
“재화 네가 방해하는 거 아니야?”
“방해는 무슨.”
“수족처럼 부려 먹으니까 애가 연애할 짬도 안 나지. 우리 해성이 이상형은 뭐야?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꼭 봐라. 잘생기면 얼굴값 하지만 못생기면 그냥 꼴값하는 거니까. 어차피 남자들 다 거기서 거기거든.”
시화는 연애에 개방적인 편이었다. 딱히 가리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막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많이 당하고 겪은 모양이었다.
“그냥…….”
입만 열었을 뿐인데 시화와 재화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젓가락을 놓으며 해성이 웃었다.
“안정적이고 다정한 사람?”
태어나 다정함을 느껴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유일하게 민혁 정도일까? 원래 그런 성향의 사람들인 것 같았다. 늘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부러웠다. 해성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시화가 웃었다.
“어떤 타입인지 알겠네.”
말 그대로 이상형일 뿐이었다. 현실과 아닌 것쯤은 구분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딱히 누군가를 만나 감정을 교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몰랐네. 송해성도 이상형이 있는 줄은.”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재화가 피식 웃었다. 그냥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재화에겐 못마땅한 듯했다.
“재화 네가 주선 좀 해봐. 그래도 남자는 남자가 알 거 아냐.”
시화의 말에 재화는 해성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그러면서 방금 전까지 그녀의 몸속을 헤집던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쓸었다. 그런 재화를 보며 해성은 입술 안쪽의 살을 슬쩍 씹었다. 몸이 다시 긴장을 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