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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히게 해줘-29화 (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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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엇인가가 해성의 머리를 짓이기고 기어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걸 물리치기 위해 손바닥 살이 패일 정도로 주먹을 쥐어 힘을 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행이구만.”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왔다. 찻잔을 내려놓은 비서가 해성의 앞으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비서가 나가자 장준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열어봐.”

“네.”

서류를 열자 매매 계약서와 공인중개사 명함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통장 하나도 따로 들어있었다. 해성은 주소를 빠르게 확인했다.

“통장도 좀 살펴봐.”

“네, 회장님.”

통장을 열자 예금이 눈에 들어왔다. 이 돈은 해성의 월급을 거의 10년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할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우리 송 과장이 회사에 들어와 승전보를 울릴 때마다 내가 차곡차곡 준비해 둔 돈이야.”

“감사합니다.”

“그 정도면 3년 정도는 눈에 띄지 않고 살 수 있겠지?”

그러니까 장준은 지금 재화의 눈에 3년 정도 띄지 않으면 완전히 남녀 관계가 끝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아, 물론 그건 다 우리 송 과장 재산이니까 마음대로 써도 상관없어.”

“네, 감사합니다.”

“물론 다른 회사를 다녀서도, 흔적을 남겨서도 안 된다는 거 알고 있겠지? 똑똑한 사람이니까 이해가 빠를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 푹 쉬어. 안식년이 좀 길다고 생각해. 3년 뒤에 다시 회사 상무 자리 약속하지.”

3년 뒤라. 그냥 듣기 좋으라 하는 말이었다. 이 정도의 돈을 주니 알아서 영원히 재화의 인생에서 꺼져달라는 말이었다. 어차피 그 정도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재화는 금세 송해성이라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관심도 없어질 것이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녀가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게 다행이면서도 놓치는 게 아까운 모양이었다. 어쩐지 장준의 얼굴엔 씁쓸함과 안도가 교차했다.

“정리할 시간 얼마나 주실 겁니까?”

“재화 녀석이 의심 없이 있으려면 한 달 정도면 될까?”

해성이 테이블 위에 있는 달력을 보았다. 올핸 한강의 벚꽃을 보지 못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오늘부터 본부장님 모르시게 정리하겠습니다.”

과연 장준은 어디까지 자신을 믿는 것일까. 금화 토건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불법적인 일들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장준이 쉽게 놓아줄 리는 없었다. 아직 장준의 뒤엔 따로 음지에서 움직이는 식구들이 있었고 그것도 해성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허튼짓을 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준비를 하라는 뜻일 것이다.

“혹시라도 좋은 남자 만나 식이라도 올리면 꼭 연락 주고. 혹은, 필요하면 연락하고.”

“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일어나 고개를 숙인 해성이 회장실을 나가려고 했다.

“해성아.”

장준이 오랜만에 해성의 이름을 불렀다.

“네, 회장님.”

“네가 사내놈이었으면 참 좋을 뻔했어.”

“유감입니다.”

해성의 말에 장준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다시 숙인 해성이 회장실에서 나왔다.

사무실로 내려오자 직원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다들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같이 동고동락하며 일하던 직원들이라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그만두어야 한다는 게 아쉽긴 했다. 자리로 돌아가는데 책상 위에 거대한 꽃바구니가 놓여있었다.

“이거 뭐예요?”

“조금 전에 배달 와서 과장님 자리에 올려뒀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뭐라도 남은 메모가 없나 찾는데 갑자기 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 폭죽 종이가 팔랑거리며 반짝였다.

“차장님, 진급 축하드려요.”

“축하드려요.”

갑작스러운 승진이 결정되었다. 분명 이것도 장준의 지시일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차장으로 승진까지 시켜놓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사라질 거라고는 재화가 아예 의심을 하지 못하도록 할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승진 못 하시면 진짜 억울했죠.”

“진짜. 우리가 더 억울할 뻔했다니까요.”

“내일 승진 턱 쏘시는 거죠?”

모두가 한턱내라 아우성이었다. 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회에 팀원들에게 제대로 선물을 하고 조용히 떠나도 좋을 것 같았다.

“과장님, 본부장님이 찾으시는데요.”

“지금 간다고 전해드려요. 그리고 꽃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팀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복도로 나와 끝에 있는 본부장실로 향했다. 비서들도 이미 소식을 들은 모양인지 해성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승진 턱에 꼭 같이 참여하겠다며 다들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래도 회사를 다니면서 사람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쌓았는데. 씁쓸함에 입이 썼다.

노크를 한 해성이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막 서류를 정리하던 재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뭘 벌써 출근을 해?”

“컨디션 다 돌아왔습니다. 원래 기관지가 좀 약해서 목까지 다 나으려면 2주 정도는 걸릴 겁니다.”

말을 마치는데 어느 순간 재화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월요일에 재화가 잠시 지방으로 출장을 가며 3일 만에 만났다. 재화의 손이 자연스럽게 해성의 이마로 올라왔다.

해성이 흠칫 뒤로 물러났다. 그런 해성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재화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 병 있는 것도 아닌데 피해?”

손길이 닿자마자 찌르르함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결국 이게 사람들이 말하던 그 성적긴장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재화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의 열을 체크하기 위해 손을 대는 것이었겠지만 해성은 혼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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