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누군가에게 이렇게 보살핌을 받은 건 아주 어렸을 때 빼고는 처음이었다. 어쩐지 눈물이 고이는 것 같기도 했다. 원래 아프면 마음이 약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입술을 질끈 깨무는데 순간 놀란 해성이 눈을 크게 떴다. 재화가 직접 죽을 떠서 그녀의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내가 먹으면 돼.”
재화의 손에서 숟가락을 가져와 입으로 가져갔다. 미지근하게 식은 죽은 먹기 좋았다. 빠르게 죽을 비워내고 옆에 있는 약까지 털어 넣었다. 재화가 상을 치우러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해성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입이 텁텁해 이를 닦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아직 열 있는 상태야.”
“많이 좋아졌어.”
다행히 건강은 타고난 편이었다. 아무리 많이 아파도 하룻밤 꼬박 앓고 나면 다음 날엔 거의 말짱해졌다. 이를 닦고 있는데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거울을 통해 팔짱을 낀 채로 문가에 기대어 삐딱하게 고개를 숙이고 보고 있는 재화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입을 헹궈내자 재화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은데.”
“아직 어지러울 거 아니야.”
아주 약간 어지러움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부축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친절한 재화를 보는 게 처음이라 사실 약간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정말 본인 때문에 아프다고 생각해서 저러는 것일까?
“바쁘지 않아? 그냥 가도 돼.”
“내가 불편해?”
“어?”
“하긴, 편한 상대는 아닌가?”
재화가 살짝 이마를 긁었다. 그런데 재화의 손등이 살짝 까져있는 게 보였다.
“손등에 왜 상처가 났어?”
“별거 아니야. 좀 긁혔어. 일단 누워.”
“너무 오래 누워있었더니 허리 아픈 것 같아서.”
결국 차를 마시기로 했다. 해성이 준비하려고 했지만 재화가 앉아있으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와 준비해 들어왔다.
티 테이블에 마주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는데 이것도 어쩐지 어색해서 해성은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역시 이런 식으로 재화와 조용히 마주 보고 있는 건 불편했다.
“어제…….”
막 차를 마시던 재화가 잔을 내려놓았다. 해성은 잔을 꽉 움켜잡았다. 묻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됐어?”
그 물음에 재화가 픽 웃었다. 그리고 다시 찻잔을 채우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럭저럭.”
“그럭저럭?”
“거절하기엔 너무 좋은 자리잖아.”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재화는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08.
예상외로 몸살의 여파는 꽤 오래갔다. 입사이래 제대로 된 휴가도 가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재화는 일주일 유급 휴가 처리를 한다고 했지만 해성은 목요일에 바로 출근을 했다. 열이 떨어질 때쯤 다시 오르기를 반복했다. 아직 컨디션이 완전히 100%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허스키한 목소리만 남아있을 뿐 거의 나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출근을 하자마자 회장실로 올라갔다. 완섭을 보는 게 껄끄럽긴 했지만 장준의 부름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비서실 안의 완섭을 보고 해성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왜 재화의 손등이 까져있었는지 완섭의 울긋불긋한 얼굴을 보고 이해가 되었다. 완섭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회장실 앞으로 걸어간 해성은 노크를 하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장준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출근했습니다, 회장님.”
“그래, 와서 앉아. 여기 따뜻한 차 두 잔.”
인터폰을 누른 장준이 비서에게 지시를 하자 해성은 소파에 앉았다. 춥진 않았지만 아직 목덜미에 남은 키스 마크와 잇자국 때문에 터틀넥을 입고도 혹시 몰라 스카프까지 둘렀다.
“많이 아팠는지 얼굴이 해쓱해졌네.”
“이제 괜찮습니다.”
“참, 이거.”
장준이 테이블 위에 있는 차 키를 해성의 앞으로 밀었다. 보자마자 해성이 타고 있는 차보다 더 상위 버전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신없을 것 같아서 내가 준비했어. 지하 3층 A열에 차 대놨다니까 타고 다녀.”
“감사합니다. 봉투는 다시 드리겠습니다.”
“아냐, 용돈으로 써. 그렇게 수고를 했는데 내가 이쯤은 해도 모자라지. 사실 우리 송 과장이 부모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곱절의 곱절 이상은 갚은 셈인데.”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어차피 장준이 죽기 전까지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희망이라는 것이 꺾였기 때문에 기대할 것도 없었다.
“재화 녀석 밑에서 일하느라 고생 많은 거 다 알고 있어.”
“아닙니다.”
“녀석이 딱히 뭐 힘들게 하는 건 없고?”
“없습니다.”
“허허, 답이 바로 나오네.”
괜히 장준이 그녀를 불러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그녀가 정신이 없을 때 장 박사가 왔다 갔다고 했다. 그땐 샤워 가운만 입고 있었으니 분명 몸에 새겨진 것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걸 보고 장준의 사람인 장 박사가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집이 너무 가까워도 불편하지?”
“그렇다고 대답하면 본부장님께 실례가 될 것 같은데요.”
장준이 손가락을 툭툭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장 박사에게 피 검사 결과는 받았다. 역시 똑똑한 애라 피임도 제대로 했더군.”
해성은 그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말을 삼갔다. 장 박사는 그녀가 누워있을 때 피를 뽑아가 임신 유무를 확인했던 모양이었다.
“너무 먼 건 좀 그렇고, 부산 쪽은 어떻게 생각하나?”
부산?
장준은 이제 해성을 재화에게서 떨어뜨릴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이제껏 그녀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런데 왜 저도 모르게 망설여지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