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샤워를 한참이나 오래 했다. 완섭에게 잡힌 오른쪽 가슴이 괜히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옷 위로 만진 것이고, 잠깐이었는데도 불쾌해서 짜증이 일 정도였다. 살이 벌겋게 변할 정도로 문지르고 나서야 샤워를 마치고 나와 새로 시트를 간 침대에 드러누웠다.
머리카락을 말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왠지 지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었다. 몸이 이렇게 무거운 건 고등학생 때 갑작스러운 가을비에 맞아 몸살에 걸린 이후로 오랜만인 것 같았다.
숨을 쉬는 게 어쩐지 힘들었다. 코로 나오는 숨이 뜨거웠고 침을 제대로 삼키기 힘들 정도로 목이 아픈 것도 같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눈앞이 뿌연 건 눈물이 잔뜩 고여있기 때문임을 알았다. 거기다 어쩐지 으슬으슬 몸이 추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일어나서 물을 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누워있어.”
낮은 목소리에 재화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링거 팩이 보였고 팔등에 꽂혀있는 주삿바늘이 보였다.
“장 박사님 왔다 갔어.”
“어…….”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잔뜩 쉰 소리와 아픔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래도 몸살감기가 지독하게 온 모양이었다.
“이 링거 다 맞을 때까지도 열 안 내려가면 입원 고려해야 돼. 목말라?”
입을 벌릴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재화가 밖에 나가 생수병을 가져왔다. 물을 마시려면 일어나긴 해야 했다. 하지만 재화가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물을 머금었다. 설마 했지만 고개를 숙인 재화가 입을 맞췄다. 입 안으로 들어온 미지근한 물이 꿀꺽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재화는 다시 한번 물을 머금었다. 괜찮다고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입을 맞춘 재화는 물을 넘겨주었다. 물이 꿀꺽 넘어가자 재화의 혀가 안으로 들어와 입천장을 한 번 쓸고 나갔다.
“뜨겁네.”
“감기 옮아.”
물을 넘기자 그나마 건조했던 목의 찢어지는 아픔이 덜한 것 같았다. 잔뜩 쉰 목소리이긴 했지만 조금 전보단 조금 더 쉽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성대가 찢기는 느낌에 손으로 목을 감쌌다.
“그럼 송해성이 그때 간호해주면 되겠네. 더 줘?”
아무래도 또 입으로 물을 건네줄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재화는 생수병을 협탁 위에 올려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커다란 손이 해성의 이마에 닿았다. 생수병을 조금 전까지 쥐고 있어서 그런지 손바닥이 시원했다.
“두 팩짼데 아직도 열이 꽤 높네.”
“몇 시야?”
“11시.”
눈을 크게 떴다. 집에 돌아왔을 때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샤워를 아무리 오래 했어도 1시간 이상을 넘지 않았고. 그럼 벌써 거의 10시간이나 이렇게 누워있었다는 말이었다.
“언제 왔어?”
“2시.”
숨을 뱉자 뜨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다시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표정으로 읽은 건지 재화는 자리를 옮겨 자신의 허벅지 위로 머리를 올려 생수병을 대주었다. 조금 전보단 조금 더 편하게 물을 마시고는 이마를 짚었다. 손도 뜨거워서 그런지 이마의 열이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너무 무리하게 만들었나 보네.”
그렇지 않아도 얼굴로 열이 올라 빨갛게 변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젯밤이 스쳐 지나가자 왠지 더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야.”
재화의 허벅지 위에서 머리를 내리며 조금 더 편하게 자리를 잡으려고 했다.
“그만 올라가서 쉬어.”
“링거 다 맞으면 바늘 빼야 돼.”
“그 정돈 내가 해도 돼.”
“자느라 약 다 떨어진 것도 모를 거 아니야. 아프니까 말 그만하고 그냥 자.”
재화가 손등으로 그녀의 볼을 한 번 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언젠가 꼭 한 번 겪어 본 듯한. 순간 해성이 재화의 손목을 잡아 붙들었다.
“혹시, 이런 적 또 있었어?”
“꿈꿨어?”
“아닌가.”
아파서 그런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시 눈이 감기는 걸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몸이 어쩐지 조금 시원한 것 같았다. 살짝 눈을 떴을 때 재화가 그녀의 팔을 찬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땀을 너무 흘려서 좀 닦는 게 좋을 것 같았는데. 좀 괜찮아?”
고개를 돌리자 이미 링거는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벌써 아침인 모양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9시를 막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37.6도. 열도 많이 내려갔어. 일어난 김에 힘들지 않으면 좀 앉아봐.”
재화의 말에 말을 잘 듣는 로봇처럼 도움을 받아 앉았다. 분명 그녀는 샤워 가운을 입고 누워있었지만 이 샤워가운이 아니었다. 재화가 그녀가 정신이 없을 때 한 번 갈아입힌 모양이었다. 가운 끈을 풀자 절로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가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재화는 표정 변화 없이 해성의 몸을 닦고 있었다.
차가운 수건이 가슴을 쓸고 내려가자 몸을 흠칫 떨었다. 재화의 시선이 계속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재화가 낮게 한숨을 뱉었다.
“아픈 사람 상대로 굶주린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맨몸을 보인 것보다 더한 것도 했는데 왜 자꾸 몸이 움츠려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몸을 닦아내는 재화의 행동이 어쩐지 섹스를 할 때보다 더 야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엎드려.”
고개를 끄덕인 해성은 조심스럽게 엎드렸다. 곧 등으로 차가운 수건이 쓸러 내려갔다. 차가운 수건이 아직 후끈한 등을 쓸자 시원한 느낌이 들었지만 갑작스러운 온도변화에 몸이 자꾸만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옆구리를 스치는 느낌에 자꾸 생각을 분산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가 눈을 뜨기 전에 재화가 다리는 닦은 모양이었다. 새로운 샤워 가운을 가져와 입힌 재화는 그녀를 다시 눕게 만들고 찬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시트를 덮어주었다.
“잠들지 말고 잠깐 기다려.”
어차피 자려고 해도 이미 잠도 다 깼다. 열이 많이 올랐을 때와는 다르게 정신도 온전히 돌아왔고 몸을 닦아내서 그런지 오히려 개운한 느낌까지 들었다. 어제완 달리 몸 컨디션이 훨씬 좋았다. 어쩌면 어제 아침부터 열이 올랐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 작은 상을 들고 온 재화가 침대 위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좀 먹고 약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