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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해성이 인사를 하자 민혁이 웃으며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당연히 출발할 줄 알았는데 재화는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출발 안 해?”
그러자 고개를 돌린 재화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밖은 아직 민혁이 서 있고 조명으로 인해 차 안의 상황이 뻔히 보이고 있었다. 순간 굳어있는데 픽, 웃는 소리와 함께 팔을 뻗은 재화가 안전벨트를 끌어당겨 꽂고는 물러났다. 이내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천하의 송해성이 쫄았나 봐?”
여전히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재화가 놀리는 말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이 보기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좀 놀랐어.”
“뭘 그런 걸 가지고.”
“혹시 내일 점심시간 괜찮아?”
“내일? 설마 데이트 신청 같은 건 아닐 거고.”
창틀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괸 재화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쩐지 재화의 입에서 저런 단어가 나오는 게 어울리지 않았다. 확실히 재화는 섹스를 한 뒤로 조금 더 거리감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괜찮은 전시회가 있어서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럼.”
다행이다. 이렇게 별 의심 없이 내일 약속 장소에 데리고 갈 수 있어서.
“영감은 왜 전화했어?”
역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시공 딴 도곡동 건물 지시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 진행 사항 물어보시려고.”
“명진하고 하는 거?”
“응.”
“그러고 보니 아직 합의가 안 된 모양이던데. 또 옛날식으로 용역들이 가서 쓰는 건 아니지?”
재화는 확실히 금화 토건이 예전의 그 양아치 기질이 남아있는 것을 싫어했다. 여전히 장준은 돈이나 말이 통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재화와 트러블이 일어났는데 중간에 중재를 하는 건 결국 해성이었다. 다행히 재화가 들어온 뒤로 거의 8할 정도는 적당한 보상과 중재로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럴 일 없을 거야.”
“영감도 사업이 커질수록 몸 사려야 하는 거 배워야 할 거야.”
“회장님도 많이 변하셨어.”
“변하긴, 개뿔.”
재화가 욕설을 뱉으며 핸들을 돌렸다. 여전히 사업 방식에서 두 사람은 꽤 많이 부딪쳤기 때문에 해성은 되도록 GF 엔지니어링으로 재화가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곧 2월이니 곧 공고 발령이 날 것이다. 앞으로 보름 정도만 참으면 두 사람의 사업상 갈등이 조금은 더 완화될 것으로 보였다. 그래봤자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 하는 해성은 여전히 고달프겠지만 그건 금화 토건의 노예로 팔려 온 시점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배는?”
“배?”
“음식도 그저 그렇고 통 못 먹던데.”
“괜찮아. 그래도 이것저것 계속 주워 먹어서.”
준비된 스테이크는 부드러웠지만 딱히 입맛이 있는 건 아니라 절반도 채 먹지 못했다. 결국 과일 몇 점을 더 먹고는 식사를 그만뒀다.
차는 곧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무슨 친구 전화를 그렇게 딱딱하게 받아.]
“방금 헤어졌는데 전화가 와서.”
[미안한데 저번에 다쿠아즈 그거 어디서 산 건가 해서. 유주가 먹고 싶대.]
“내가 메시지로 주소 보내줄게.”
[고마워. 내가 나중에 제대로 대접할게.]
“됐어, 이런 걸로 뭘. 그럼 끊을게.”
통화를 끝내자 이미 주차를 한 뒤였다.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해성은 재화가 먼저 올라가고 난 뒤에 올라갈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탄 재화가 해성을 보았다.
“타.”
어차피 어떤 엘리베이터를 타든 상관없었다. 결국 올라탄 해성은 눌러진 버튼을 보고 숨을 크게 마셨다. 재화는 그냥 넘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07.
몸이 찌뿌둥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 역시 어젯밤의 격한 섹스 때문이었다. 현관에서 거실, 그리고 침실. 재화는 말 그대로 해성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목엔 키스 마크와 더불어 이를 박아 넣은 흔적까지 있었다. 어젯밤엔 쾌락에 젖어 목덜미를 씹은 줄도 몰랐다.
목을 완전히 감싸는 터틀넥을 입었지만 어쩐지 따끔거리는 느낌에 한 번씩 목을 움츠리게 되었다. 옆에 타 있는 재화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이 든 게 아니라는 것쯤을 알 수 있었다. 요즘은 전시회를 호텔을 빌려 할 때도 있었기 때문에 도착을 해도 재화는 크게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은근한 긴장감 때문에 손바닥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차가 로비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해성은 재화의 모습을 한 번 살폈다. 재화는 늘 슈트를 제외한다면 깔끔한 베이직 스타일로 입었다. 오늘도 당연히 전시회를 보러 가는 줄 알았을 테니 저런 차림새일 것이다. 슈트를 입히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괜히 드레스 코드를 알려주었다간 의심을 살 것 같았다. 어쨌든 이 자리로 재화를 데리고 나오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다행히 재화는 딱히 의심을 하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토요일이라 로비가 붐벼 자연스레 다시 해성의 어깨로 손을 얹으려고 했지만 빠르게 몸을 피했다.
“몸이 무거워.”
“아.”
해성의 몸 상태는 누구보다도 재화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재화는 주머니로 손을 꽂아 넣으며 해성의 뒤를 따랐다. 물론 핑계가 아니라 확실히 물을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장준의 요구대로 재화를 그 장소까지 안내한 다음 바로 돌아가서 푹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어쩐지 이번 주 내내 신경이 곤두서서 제대로 깊은 잠을 자지 못해 피곤이 쌓인 것 같았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복도 끝으로 보이는 완섭을 보며 재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날카로운 시선이 얼굴로 고스란히 쏟아졌다. 하지만 이내 문을 열고 나타난 장준을 보며 해성이 낮게 한숨을 뱉었다.
“어쩐지, 장소가 이상하다 했어.”
“회장님이 부탁하셔서.”
“그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