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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도 해성이 속해 있는 한국대학교의 연합동아리에 거물급 인사들이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재화의 말처럼 장준은 본인이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커서 그런지 엘리트 집단에 대한 동경이 상당했다.
[송 과장이면 괜찮은 인물들 소개해줬겠구먼.]
“앞으로 본부장님께 도움이 되실만한 분들 소개해드렸습니다.”
[내일 재화 녀석 스케줄이 있나?]
해성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보통 재화는 주말에도 꽤 스케줄이 꽉 차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토요일은 거의 반년 만에 공식적인 스케줄이 거의 없었다.
“내일은 공식적인 스케줄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잘됐네. 내일 12시까지 H 호텔로 오면 되겠어. 송 과장, 혹시 남상천 의원 알고 있나?]
판사 출신의 여당 의원으로 내후년에 있을 대통령 후보로 점 처지는 인물이었다. 여론도 좋고, 판사 시절의 대쪽 판결로 워낙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입니다.”
[마침 남 의원 여식이 유학을 마치고 들어왔다고 해서 말이야. 재화 녀석에겐 비밀로 하고 준비해. 알면 또 난리를 치고 안 나갈 테니.]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전화가 끊기자 해성은 낮게 숨을 뱉었다. 몸을 섞어서인지 예전보다는 재화가 해성을 대하는 것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러니까 적어도 전처럼 아예 진저리를 치는 것처럼 거부감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다만 내일 어떻게 함께 외출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해야 했다. 정말 솔직히 말한다면 재화는 분명 그 자리에 해성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양해를 구하게 만들 것이다. 이제껏 몇 번 있던 선 자리에 모두 해성이 그렇게 나갔었다. 그래서 이번엔 장준도 심혈을 기울인 모양이었다. 남 의원의 여식이라면 분명 탐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해성은 빨리 핸드폰으로 남 의원을 검색했다. 남유정, 미대 전공의 주목받는 술수 예술 작가였다. 특히 세라믹 조각에 두각을 나타내며 이미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 정도로 젊은 나이임에도 능력이 있었다. 확실히 장준의 입맛에 맞는 재화의 이상적인 상대였다.
“뭐해?”
핸드폰을 주머니로 넣는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섰다. 거기엔 재화가 살짝 피곤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하긴, 주 교수와 양 의원이 워낙에 관심을 보이며 상대를 하다 보니 피곤할 만했다. 남들 앞에선 친근하게 보이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는 타입이기도 했다.
“잠시 통화 중이었어.”
“누군데?”
“회장님.”
“영감이 또 왜? 집에 오라고?”
“응.”
“대체 뭘 그렇게 부려 먹는 거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재화의 인상이 구겨졌다. 완벽히 갖춰 입은 슈트 때문에 어쩐지 평소보다 더 딱딱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게 재화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워낙 틈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충 마무리하고 가. 할 인사는 다 한 것 같은데.”
“그럼 들어가서 인사만 하고 나올게.”
그 말에 재화가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다시 안으로 들어선 해성은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고 재화 역시 악수를 하며 마무리를 했다. 잘 다듬어진 손톱을 물고 있는 수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럼 나중에 또 뵐 수 있으면 뵙겠습니다.”
수진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인 해성이 그녀를 스쳤다. 아무래도 쪽지를 여전히 재화에게 건네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찌르는 시선이 따가웠다.
“저기…….”
수진이 재화를 불러세웠다. 재화는 느긋한 얼굴로 수진을 보았다.
“네, 강수진 씨.”
“허.”
깍듯이 대하는 재화를 보고 수진도 차마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재화는 그런 수진을 내려보며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그리고 상체를 살짝 숙이며 수진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약을 좀 끊는 게 낫지 않을까?”
순간 수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 재화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해성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며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내려가며 해성은 어깨를 두르고 있는 재화의 팔을 빼내기 위해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하지만 재화는 손에 힘을 주어 잡은 채 해성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는 거 안 좋아.”
“뭐가?”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며 다른 사람들이 올라탔다. 재화는 자연스럽게 해성을 조금 더 끌어당기며 자신의 옆으로 붙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 잦아진 스킨십은 장소를 딱히 가리지 않았다. 그게 해성은 불편했지만 재화는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멈춰서자 두 사람은 사람들을 따라 천천히 내렸다. 그때 반대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민혁과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가 좋아 보이네.”
이제껏 함께 있어도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었다. 이렇게 재화가 해성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마 민혁도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 모습은 누가 보아도 친근한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가는 길?”
“응. 우리 약혼녀 병문안을 또 가줘야 안 삐지거든.”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연애를 하는 것처럼 사이가 좋은 타입도 있었다. 누가 보아도 유주는 민혁에게 한눈에 푹 빠져있는 티가 났다. 눈에서 그렇게 감정이 흘러넘치는 사람을 참 오랜만에 보아서 해성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민혁의 눈에서도 유주를 대하는 눈빛이 따뜻하고 애정이 넘쳤다.
“그쪽이 사이는 더 좋아 보이네.”
“곧 결혼인데 당연히 좋아야지.”
민혁이 웃음을 참지 않으며 두 사람과 함께 발걸음을 맞췄다. 이미 위에서 지시를 해 놓은 뒤라 재화의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조만간 애들하고 한잔하자. 결혼 전에 그래도 정식으로 소개는 해야지. 해성이 너도 되도록 참석해줘. 거기 시커먼 놈들만 있어서 우리 유주 무서워한다.”
“그렇게 할게.”
“가라.”
그렇게 말하며 재화가 먼저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당연히 운전을 하려던 해성이 잠시 멈칫하자 민혁은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
“가, 나중에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