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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 씨 아프다며?”
“갑자기 좀 안 좋은가 봐.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그래.”
고개를 끄덕인 해성이 막 민혁을 지날 때였다.
“어머? 송 과장님을 여기서 다 뵙네요?”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는 수진이 보였다. 해성은 차분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강수진 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모임이 있어서요.”
그 말에 수진이 고개를 돌려 연회장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저쪽?”
“네.”
“생각보다 우리 송 과장님이 훨씬 엘리트셨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해성이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진은 재화와 함께 침대를 뒹굴던 여자였다. 왠지 묘한 기분에 얼굴을 보기 껄끄러웠다.
화장실로 들어와 거울 앞에 섰다. 딱히 화장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립스틱도 지워지지 않았다. 원체 옅은 색이라 크게 티가 나진 않았지만 해성은 한 번 더 덧바른 뒤 손을 씻었다. 그때 막 옆으로 서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의 수진과 눈이 마주쳤다. 수진은 붉은 립스틱을 바르며 손가락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요즘 재화 씨 만나는 여자 있어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한 해성은 손을 씻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이 손을 적시자 차가웠던 손의 온도가 조금은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내 쪽지는 건네줬어요?”
“네.”
그 말에 수진이 기가 차는 듯 쯧, 소리를 냈다.
“확실해요?”
“그렇습니다.”
“송 과장님.”
“네.”
“혹시 다른 마음 있어요?”
“다른 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거라면.”
“뭐, 신데렐라가 되고 싶다거나.”
그 말에 해성이 낮게 웃음을 뱉었다. 그런 해성의 모습에 수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뭘 상상하시는지 잘 알겠지만 제가 답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아니, 혹시라도 그런 생각하는 거라면 꿈 깨는 게 좋을 거라고.”
“그 꿈 꾸고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강수진 씨로 보이는데요.”
해성이 수진을 위아래로 한번 천천히 훑어내렸다. 재화의 여자였을 때나 존중했던 것이지 지금은 딱히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봐요.”
“네.”
“허, 참.”
어차피 말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긴, 연예계에 10년 이상이나 있었는데 수진도 눈치라는 게 발달했을 것이다.
“본부장님이 질척거리는 거 제일 싫어하십니다.”
“뭐라구요?”
“그냥, 경고해 드리는 겁니다. 강수진 씨를 위해서.”
그렇게 말한 해성은 손을 탈탈 털고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뒤에서 무엇인가 던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연회장으로 돌아와 재화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열린 문 사이로 수진이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수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아, 강 배우. 여기야.”
아무래도 수진을 데려온 건 주 교수인 모양이었다. 주 교수의 옆에 서 있던 재화의 표정이 수진을 발견하곤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그런 표정을 금세 지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 교수는 수진을 인사시키기 시작했다. 어차피 배우에게 스캔들은 치명적이었고 수진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주 능숙하게 재화와 해성을 처음 만나는 것처럼 잘 연기하고 있었다.
그런 수진을 본 민혁이 해성과 눈이 마주치자 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복도에서 아는 척을 하던 수진과 해성이 처음 만나는 것처럼 연기하는 게 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옆으로 걸어온 민혁이 고개를 살짝 숙여 해성의 귓가에 속삭였다. 목소리엔 다분히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벌써 정리 끝난 거야?”
“그런 걸로 알아.”
“유능한 송 과장님이 모르면 누가 안다고.”
어깨를 툭 치며 재미있어하는 민혁을 보고 해성이 낮게 웃었다. 그런 해성의 웃음소리가 거슬리는 모양인지 날카로운 재화의 시선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수진은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가슴도 슬쩍 드러내는 디자인이었지만 평소의 이미지가 좋아 오히려 고급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주 교수에게 팔짱을 끼고 가슴을 거의 붙인 채로 웃고 있는 건 누가 보아도 재화의 시선을 끌기 위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재화는 그런 수진에겐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해성은 저런 재화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침대에서 뒹굴던 여자가 아니던가. 그 침실을 정리했던 것도 다름 아닌 해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듯 굴고 있지 않은가. 하긴, 따지고 보면 해성 역시 수진과 별다를 게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도 재화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완벽하게 수직관계를 연기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고 있는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바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해성이 서둘러 중정 공원으로 빠져나와 구석으로 걸어갔다.
“네, 회장님. 해성입니다.”
[어디야?]
“오늘 연합동아리 모임이 있어 본부장님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