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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 조명을 끄고 막 몸을 돌려세우던 해성이 잠시 멈칫했다. 스탠드를 켠 채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재화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뭐해?”
침대로 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재화가 물었다.
“여기서 자려고?”
“그럼?”
“그럼 내가 다른 방에 가서 잘게.”
해성의 말에 재화가 낮게 한숨을 뱉었다. 그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는 수 없이 침대로 걸어간 해성은 재화의 옆으로 누웠다. 재화도 바로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옆으로 누워 자연스럽게 몸을 끌어당겼다. 그녀가 조금 전 눈을 뜨기 전의 자세 그대로였다.
어차피 놓아달라고 해도 놓지 않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해성은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 몸을 반대쪽으로 돌려 옆으로 누웠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재화가 조금 더 끌어당겼고 해성의 뒤로 재화의 몸이 완전히 붙었다.
어쩐지 불편한 느낌이 들어 허리를 살짝 떼어내자 재화는 아예 해성의 골반을 잡고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몸을 붙였다.
“더 자극하지 말고 그냥 자.”
아직 잠이 모자란지 재화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낮고 허스키했다.
“좀 불편해서.”
“그럼 몸을 돌리든지.”
그렇게 말하면서 재화는 힘으로 자신을 마주 보게 해성을 돌렸다. 암막 커튼으로 인해 아예 형체도 보이지 않았지만 눈이 마주쳤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 해성은 살짝 눈꺼풀을 깔았다. 허리춤을 두르고 있던 재화의 손이 올라와 해성의 턱을 잡고 살짝 올렸다.
곧 입술이 닿았고 생각보다 키스는 길었고 꽤 거칠었다.
가로막힌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올 때마다 재화의 키스가 더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제때 삼키지 못한 엉킨 타액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고 숨이 막힐 때쯤 키스가 끝이 났다. 재화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해성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넣어지고 싶은 거 아니면 그냥 잠이나 자.”
생리를 하는 상태에서 섹스를 할 수는 없었다. 해성은 결국 불편한 잠을 청해야 했다.
#06.
동아리 모임이라고 해도 워낙 거물급 인사들이 많다 보니 연회장 전체가 마치 거대한 행사처럼 꾸며져 있었다. 재화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고 해성은 당연한 것처럼 옆에 서서 보좌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동안 금화 토건의 위상이 몇 년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모양이었다. 분명 한국대 모임이었는데 꼭 재화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기업 자체가 가진 힘이 큰 모양이었다. 게다가 민혁과 재화가 친한 친구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약혼녀를 소개하던 자리에서 껄끄러웠지만 남자들이다 보니 이미 그런 건 털어낸 모양이었다. 재화와 민혁은 평소와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민혁과 함께 온 파트너는 유주가 아닌 비서였다.
“오늘 김 비서님이 오셨네요.”
“네. 약혼녀분이 몸살로 몸이 좋지 않으셔서요.”
“네, 그럼.”
김 비서 역시 한국대 출신이기도 했고, 아는 얼굴도 몇 있는 모양이었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해성도 고개를 돌리다 최근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영화평론가인 주 교수와 양 국회의원을 보고 바로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했다. 원래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지만 이번에 더 돈독하게 관계를 쌓아두면 앞으로 써먹을 일이 훨씬 많았다.
“우리 해성이는 갈수록 더 얼굴이 피네.”
“양 의원, 요즘 그런 거 성희롱이야.”
“아닙니다. 의원님도 얼굴 좋아 보이시는데요.”
“그럭저럭 성과가 괜찮아서. 괜찮으면 해성이 너도 조만간 같이 한잔하자. 우리 주 교수님께서 초대하신단다.”
그 말에 해성이 주 교수를 보았다. 40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집안도 좋고, 본인 스스로도 인기가 좋던 주 교수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영화평론가로 활약을 하고 있었다.
“제가 그런 데 가도 될까요?”
“우리 해성이는 내가 늘 환영이지. 이번 개봉하는 영화 제작자가 내 친한 친구라서 같이 한잔하자고 했거든. 참, 그나저나 같이 온 친구 누구야?”
“아, 저희 회사 본부장님이세요.”
“아하, 그 후계자? 난 무슨 연예인 데리고 온 줄 알았네.”
“네. 인사드릴게요.”
해성이 잠시 목례를 한 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재화에게로 다가갔다. 잠시 대화를 중단한 재화는 해성과 함께 자리를 이동했다.
“반갑습니다. 금화 토건 위재화라고 합니다.”
재화는 자연스럽게 명함을 두 사람에게로 건넸다. 두 사람 모두 재화의 명함을 받아 들고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이렇게 미남이신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양 의원님. 의원님도 실물이 훨씬 미남이신데요.”
“허허, 내가 그 말 듣고 싶어서 말한 건 어떻게 알고.”
해성에게만 딱딱한 편이었지 재화는 사람들과 꽤 유연하게 관계를 맺었다. 재화에게도 국회의원은 꽤 괜찮은 연줄일 것이다.
“어우, 비싼 연예인 안 써도 되겠어. 금화 토건에 직접 재직 중인 두 사람이 모델로 딱 나서도 아주 인기 터지겠는데.”
“과찬이십니다.”
자주 연예인들을 보는 주 교수는 진심으로 재화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재화는 늘 사람의 이목을 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정석 미남에 깔끔한 분위기까지 가지고 있다. 그냥 겉만 보아서는 깡패 핏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재화는 자연스럽게 주 교수, 양 의원의 분위기에 섞여들었다. 해성은 잠시 실례를 하겠다는 말을 하고 연회장에서 빠져나왔다. 화려한 대리석으로 놓아진 복도를 걷는데 막 코너를 돌아 나오는 민혁과 마주쳤다.
“화장실?”
“응.”
“재화는?”
“주 교수님, 양 의원님과 대화 중.”
그 말에 민혁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 민혁의 반응에 해성이 픽 웃었다.
“영향력 제일 큰 사람은 잘도 캐치하네.”
“너도 얼른 들어가 봐. 위재화가 다 채가기 전에.”
“재화 녀석을 내가 이길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