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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귄 게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어쨌거나 해성에게도 기본적인 도덕관념은 있었다. 절대 상대가 있는 사람과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간 재화가 만난 여자들에게 이상한 시선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태생적으로 남의 것을 탐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징징대는 소리 못 들어주겠어. 그냥 네가 상대해.”
“거부권은 없어?”
그 말에 꽤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재화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해성은 차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살짝 눈꺼풀을 깔았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직원이 들어와 새로 시킨 쌀국수를 그녀의 앞에 놓아주었다.
“거부권?”
탁.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갔다. 재화는 젓가락으로 괜히 음식을 툭툭 건들고 있었다.
“무슨 거부권? 생리 때나 몸이 안 좋을 때?”
분명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재화는 일부러 묻고 있었다. 절대 그녀의 말을 들어줄 것도 아니면서.
해성은 고수를 거의 쏟듯 넣고 쌀국수를 저었다. 이제 그만 위장이 무엇이라도 많이 넣어달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시장기가 돌았다.
“난 그냥 꼴리면 할 건데.”
“식사하자. 이 자리에서 별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집으로 퇴근해.”
“말했잖아. 오늘…….”
“쑤셔 넣는 것만이 섹스는 아니잖아?”
재화가 웃으며 차를 마셨다.
*
잠에서 깬 건 등 뒤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진통제의 효과가 다 된 건지 아랫배가 슬슬 더 아파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해성은 익숙한 풍경에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익숙한 풍경이 이질적이라 다시 눈을 떴다.
이곳은 재화의 침실이었고 어제 그렇게 소파에서 쓰러진 해성은 기절할 듯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곳으로 그녀를 옮긴 건 분명 뒤에서 꼭 끌어안은 채 일정한 숨을 뱉으며 잠이 들어있는 재화인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올라가 진통제를 찾아 먹고 화장실을 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재화는 마치 사슬처럼 그녀를 팔을 교차해 꽉 끌어안고 있었다. 해성이 조심스럽게 재화의 손목을 잡고 떨어뜨리려고 할 때 더 강한 힘으로 그의 팔이 그녀를 압박했다.
“뭐야.”
이제 막 잠에서 깨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 정신을 차린 듯 재화가 그녀의 몸에서 팔을 풀고 스탠드를 켜며 시계를 확인했다. 해성은 재화의 품에서 벗어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새벽 5시 20분.
시계를 본 해성이 놀랐다. 어제 두 사람은 정시에 퇴근을 했다. 그리고 아무리 그런 상황을 즐겼어도 1시간을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즘 계속 수면이 모자라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꿈도 꾸지 않고 잤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좀 더 자.”
아직 재화는 완전히 잠에서 깬 게 아닌 모양이었다. 다시 해성을 끌어안은 재화가 아예 그녀를 마주 안았다.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왜?”
인상을 찌푸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하는 재화를 보며 해성이 솔직히 말했다.
“진통제가 필요해서.”
생리 전이나 생리 때 성적인 자극을 받으면 자궁이 수축을 해 생리통이 더 심해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긴 했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생리통이 유난히 더 심한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사후피임약을 먹은 후의 첫 생리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결국 재화가 그녀의 몸을 풀어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기다려.”
손으로 아직 잠이 깨지 않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재화가 침실을 벗어났다. 해성은 잠시 멍한 상태로 방문을 보다 고개를 숙였다. 거의 기절을 할 듯 잠이 들었다. 브래지어는 입고 있지 않았지만 다행히 재화가 그의 티셔츠를 입혀놓은 모양이었다. 거기다 기분이 나쁜 느낌에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새하얀 시트에 피가 묻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해성은 거실로 나와 소파 위에 놓여있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때 막 부엌에서 생수병을 들고나오던 재화와 눈이 마주쳤다.
“왜 나와?”
“생리가 샜어. 가서 좀 씻어야 할 것 같아. 씻고 와서 시트 갈 테니까 다른 방에서 잘래?”
“이거부터 먹어.”
재화가 해성의 앞으로 진통제와 생수병을 내밀었다. 가방을 팔에 걸친 채 그것을 받아 들어 먹는데 재화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올리며 해성을 보고 있었다. 물을 꿀꺽 삼키는데 재화는 생수병을 가져가 거의 그대로 남은 물을 한 번에 마시고는 대충 소파 위로 던졌다.
어차피 집은 바로 밑이고 계단을 통해 가면 되니 이대로 가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재화가 현관 쪽으로 같이 나오고 있었다. 원래 재화는 이렇게 남을 배웅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왜 나와?”
“같이 가려고.”
“뭐?”
“왜?”
“아냐.”
이유를 물어보아봤자 재화는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녀의 집에 같이 가려고 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재화의 집을 나섰다.
재화는 자연스럽게 해성을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어차피 펜트하우스가 쓰는 단독 엘리베이터였다. 바로 한 층으로 내려가 먼저 현관문을 연 재화는 해성이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로써 재화가 그녀의 집에 오는 건 두 번째였다. 첫 섹스를 했던 장소라서 그런지 해성은 집에 오는 게 어쩐지 그날부터 좀 어려웠다. 그동안 잠도 다른 방에서 청했을 정도였다.
“일단 난 좀 씻을게.”
해성은 바로 안방으로 향했다. 안쪽의 드레스룸에서 입을 옷과 속옷을 챙겨 들고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한참 동안이나 물을 맞으며 자꾸 고개를 돌려 욕실 문을 확인했다. 물론 갑자기 문을 열고 재화가 들어올 일은 없겠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밖에 없었다.
양치까지 하고 난 뒤 욕실에서 나와 바로 앞에 있는 화장대 앞에 서서 로션을 바른 뒤 간접 조명에 비치는 거울을 보았다. 오랜만에 깊이, 오래 자서 그런지 그렇게 피곤해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