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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노크 소리와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주문한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뜨거운지 김이 올라오는 쌀국수를 보며 음식이 다 차려지고 문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 재화는 번잡한 곳, 그리고 사방이 뚫린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할 때 가는 곳도 꽤 한정적이었다.
“과외 부탁.”
“거절해.”
“알았어.”
어려서부터 영화를 봐와서인지 해성에게도 거의 동생 같은 존재였다. 물론 영화가 해성을 아주 잘 따르기도 했다.
“내가 과외 선생 보낸다고 그래.”
“그렇게 전달할게.”
“그 여자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뱉은 재화가 짜증 섞인 손길로 후추를 뿌렸다. 아마 계속 해성이 한남동에 있었더라면 자유롭게 영화를 가르쳤겠지만 재화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사실을 말하면 소연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한다고 했어?”
“일단은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다시 연락드려서 거절할게.”
“회사원이 본인처럼 한가한 줄 아나 보지?”
한때 배우 생활을 했을 뿐 소연은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장준이 소연에게 회사 내부 이야기를 할 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소연에겐 그저 회사원이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그런 정도를 생각할 것이다. 출퇴근 시간 정확하고 가끔 야근을 하는 정도의.
“사회생활 해본 적 없으시니까.”
“그나저나 소문 돌던데. 단속 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소문?”
“요즘 만나고 다니는 남자가 나보다 어리다던데.”
원래 등잔 밑이 제일 어두운 법이다. 해성은 한남동에 갈 때면 별채 쪽에 따로 나 있는 쪽문으로 드나들곤 했었다. 일요일, 그날도 별채 쪽으로 주차를 하고 내렸을 때 옆을 스쳐 지나가던 남자가 기억났다.
분명 다듬은 태가 나는 남자로 키도 컸고, 피부도 매끈했다. 모델이나 배우일 거라고 생각했고, 통화를 하며 걷고 있었다.
[그 나이에 몸매는 죽인다니까. 졸라 쪼이는 맛도 있어.]
그냥 그 또래에 친구들과 하는 대화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남자가 소연의 이번 불륜 상대였던 것이다.
“양 비서님께 연락드릴게.”
“대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내 귀까지 들어오게 만들어.”
몇 번인가 소연의 남자 뒤처리를 한 적이 있었다. 소연은 집안사람들 중 해성을 빼고는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 그리고 재화는 해성이 소연의 남자들을 정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망신 당하고 쫓겨나기 전에 알아서 잘 좀 가리라고 해. 혓바닥이나 놀려대는 가벼운 새끼들 좀 그만 만나라고 하고.”
이 집에 들어왔을 때 해성을 제일 많이 챙겨 준 것은 소연이었다. 시화나 태화도 잘 대해주었지만 시화는 바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마주할 기회가 적었고, 태화도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 소연은 정말 거의 조카처럼 해성을 돌봐주었다. 그래서 소연이 부정을 저질러도 해성은 뒤탈이 없도록 완벽하게 증거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요즘 업무가 과중 되어 거기까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나 봐?”
“깔끔하게 정리할게.”
“이러다 나중엔 미성년자에게도 손대는 거 아닌가 몰라.”
어릴 때부터 재화는 소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중학교 때까진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 때부터는 노골적으로 굴었다. 아마도 재화에게 소연은 그나마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부정을 저지른 것을 그때 알았던 것일까? 재화를 빼고는 다른 사람들은 소연과 사이가 좋았다. 유일하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건 재화뿐이었다.
“금화 토건에 먹칠하게 만들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마.”
“자신해?”
자신할 것도 없고, 못 할 것도 없다. 아마 재화라면 이제껏 모든 증거들을 모두 모아 장준에게 까발리고 당장 소연을 쫓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참는 건 영화 때문이었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재화는 그래도 동생인 영화를 꽤 잘 챙겼다.
“해볼게.”
“먹어, 다 불었겠네.”
괜찮다고 말을 하기도 전에 재화가 벨을 누르고 쌀국수를 다시 시켰다. 그녀의 앞에 있던 그릇이 바로 치워졌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먹을 거라면 차라리 불은 면을 먹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 모임은?”
“이번 주 금요일이야. 참석하지 않으려고.”
“왜? 한민혁 때문에? 무려 재원전자 한민혁의 첫사랑이었단 소리 듣고 심란하기라도 해?”
“민혁이에게 아무 감정 없어.”
사실 감정이라는 것은 금화 토건에 속할 때부터 거세당한 것이나 마찬가지 않던가. 그리고 솔직히 민혁에게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재미없게.”
손가락으로 프렌치프라이를 가져다 씹으며 재화가 빈정거렸다. 그럼 그녀가 민혁에 대한 감정이 있었다면 재미있었을까? 친구의 첫사랑과 섹스해서? 하지만 저 말엔 반응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몸은?”
“생리 시작했어.”
앞에 있는 치킨 조각을 집어 먹는데 재화에게서 아무 말이 없었다. 시선을 옮기자 재화는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를 한 번 훑고 있었다.
“혹시라도 또 할 거라면 콘돔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사후피임약 부작용이 좀 심하거든.”
물론 그녀에게 딱히 나타나는 부작용은 없었지만 고농도의 호르몬이다 보니 몸에 좋을 리가 없었다. 의사도 그건 정말 급할 때 1년에 3, 4번 이상은 먹지 말라고 말했다. 재화는 혀로 볼을 쭉 밀며 입술 안쪽을 한 번 훑었다.
“명심하지.”
그냥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재화는 저번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해성은 입 안에 있는 음식을 기계적으로 씹었다.
“강수진 씨와 완전히 끝난 거야?”
잘 구워진 아스파라거스를 씹던 재화가 픽 웃었다.
“그쪽이 들러붙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