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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을 잘 해내고 있는 게 불만이라는 뜻이야?”
“설마. 덕분에 내가 편하게 됐는데 내가 왜 불만을 갖겠어.”
으레 그런 것이 있다. 그건 요즘에도 나오는 말이었다. ‘여자가, 계집애 주제에.’ 같은 것들이었다. 재화도 몇 번인가 접대를 받으며 그런 식으로 무시당하는 해성을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재화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쨍.
재화가 잔을 부딪쳐 왔다.
“진심이야.”
해성은 재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얼음에 희석된 위스키는 처음보다 부드럽고 시원하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재화는 위스키를 한 번에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11살 때부터 송해성은 내 말이라면 뭐든 하는 존재잖아.”
신경을 계속 긁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해성은 이미 자존심 같은 것은 버린 사람이었다. 상체를 숙여 병을 잡고 재화의 잔을 채워주기 위해 들었다.
“훈련이 아주 잘된 개새끼처럼.”
훈련이 잘되어 있다라. 그게 유일하게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짖으라면 짖고, 구르라면 구르고.
“빨아.”
허공에 병을 든 채로 잔을 채우던 해성의 팔에서 순간 힘이 빠졌다. 병과 잔이 마주쳐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아주 작았다. 잔을 마저 채운 해성이 병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화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런 식의 명령을 한 건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해성은 섹스라는 것도 알아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로 몇 번인가 영상을 보기도 했고, 접대를 나가면 실제로 보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재화의 눈치를 보기 위해 고개를 슬쩍 들었을 때 눈빛이 마주쳤다. 재화의 손이 올라와 해성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움켜잡았다. 이제 피할 수가 없었다.
“이쪽 방면으론 별로 습득력이 없네.”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던 재화의 손이 해성의 입술을 벌렸다. 위스키 잔에서 얼음을 뺀 재화가 그녀의 입으로 손가락 두 개를 넣어 혀를 문질렀다. 차가운 얼음의 촉감과 짙은 위스키 향, 약간은 짠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순식간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며 말라붙었던 입 안이 다시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타액과 물기가 섞인 액체가 해성의 턱가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입 더 크게 벌리고 혀 내밀어.”
손가락을 빼내며 재화가 말했다.
#05.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온 해성은 세면대 앞으로 걸어갔다. 손을 씻으며 고개를 들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예전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경성인지 잘 챙겨 먹는다고 해도 살이 2, 3kg 정도가 며칠 만에 훅 내려앉았다.
보통 생리를 할 때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배가 묵직함이 확 느껴진다. 대체적으로 주기가 일정했는데 오늘은 그런 느낌이 없어 걱정이 컸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평소의 그 느낌이 들어 바로 화장실로 온 참이었다.
늘 재화의 방을 치우면서 본 건 쓰고 버려진 콘돔들이었다. 태화가 몇 번인가 여자들과 실수를 한 뒤로 장준의 화가 더 심해졌다. 그리고 재화는 피임만은 철저히 지켰다. 하지만 어제 재화는 콘돔 같은 것을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집에 피임기구가 있을 일도 없었지만.
그만큼 재화는 그녀가 모든 걸 알아서 처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3일 뒤가 생리였지만 바로 주치의를 통해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아 먹었다. 어쨌거나 재화만큼 그녀도 확실한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사후피임약을 먹고 열흘 만에 생리가 시작되어 다행이었다. 혹시 모르니 이번 생리가 끝나면 바로 경구피임약을 사서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장준의 명령으로 처음 재화를 찾아갔을 땐 혹시 몰라 피임약을 먹었다. 그땐 1년 정도 피임약을 복용했었는데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아 먹지 않았다. 딱히 부작용도 없었으니 다시 먹으면 될 것 같았다.
얼굴은 파리하게 보일 정도로 하얗고, 생리 때문에 평소보다 열이 올라서인지 입술이 더 붉어 보인다. 그나마 걱정을 한숨 덜어 다행이었다.
손을 닦아내며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 이제 점심시간은 30분가량이 남아있었다. 때에 따라 점심시간은 유동적으로 쓸 수 있지만 오늘은 재화의 외근이 아예 없었으니 되도록 자리를 지키는 게 좋았다.
사무실에 들러 핸드폰과 지갑만 가지고 나올 생각으로 복도로 나오는데 막 본부장실에서 나오는 재화와 눈이 마주쳤다. 해성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식사는?”
“지금 먹으려고 합니다.”
“그럼 같이 먹어.”
“네. 핸드폰만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점심시간인데 딱히 연락 받지 않아도 되잖아.”
그 말은 바로 따라오라는 소리였다. 해성은 바로 재화의 뒤에 서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딱히 입맛도 없어 대충 커피 한 잔만 사서 들고 올라올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단단히 체하기 좋은 날인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재화가 로비 버튼을 눌렀다. 이럴 때 보통의 상사들이었다면 당연히 사내 식당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재화도 딱히 외근이 없는 날엔 사내 식당을 이용했었는데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말은 점심시간에 딱히 구애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로비 가운데의 커다란 나무는 트리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요즘은 계속 차를 가지고 다녀 로비를 들를 일이 없어 트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바로 내일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로비를 벗어나자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고 있는 게 보였다. 재화는 눈이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바로 옆 건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해성도 재화가 왜 눈을 싫어하는지는 이유는 몰랐다. 이런 날은 재화의 신경이 더 날카로울 것이다. 밥을 먹기도 전부터 벌써부터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재화가 고른 곳은 바로 옆 건물에 있는 타이 음식점이었다. 해성은 최대한 부담이 가지 않고 부드럽게 먹을 수 있는 쌀국수를 택했고 재화는 몇 가지 요리들을 주문했다.
섹스를 하고 나서 정확히 열흘만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재화와 단둘이 있는 것도 딱 열흘만이었다.
지난주엔 재화가 장준과 함께 리조트 현장 건으로 인해 해외 출장이었고, 지난주부터 어제까지 해성은 용인 아파트 부지에 대한 마무리 작업으로 정신없이 바빴다. 그래서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딱히 재화와 단둘이 마주할 일이 없었다.
그날의 섹스는 아마 재화에게 그저 배설에 가까운 행위였을 것이다. 수진과 끝을 냈어도 부를 여자들은 많았겠지만 뭔가 정성을 들이기엔 귀찮은.
“남 여사가 뭐래?”
“무슨 말인지.”
“본가 다녀갔다며.”
“별거 아니었어. 영화 입시 때문에 상담 좀 해드렸어.”
“남 여사가 그걸로 끝낼 리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