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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깐 나갔다 올게.”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밥도 다 먹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재화가 해성 쪽으로 팔을 뻗었다. 순간 해성은 어깨가 슬쩍 좁아졌지만 재화는 그저 걸린 재킷을 찾기 위함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재화의 향기가 짙게 느껴졌다. 그건 마치 차가운 겨울 바다의 냄새처럼 코가 시큰거릴 정도로 시원한 향이었다.
“두 사람 데이트 잘해. 우리가 먼저 빠져줄게.”
재화가 재킷을 입자 해성도 서둘러 코트를 걸쳤다.
“그럼 나중에 봐. 약혼녀에겐 눈치껏 먼저 갔다고 해. 아, 이건 가져간다.”
민혁이 와인 병을 드는 재화를 흘겨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여자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성은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서둘러 재화의 뒤를 따랐다.
레스토랑의 지배인은 서둘러 무전을 치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그러면서 흘낏 재화의 손을 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재화는 아직 반쯤 남은 와인 병을 들고 있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재화는 병째로 가져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이런 식으로 어쩌다 한 번 술을 마실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위스키였고, 그렇게 입을 댄 병을 재화는 순식간에 비워내고 바로 잠이 들 때가 있었다. 자주 폭음을 하지는 않지만 워낙 술이 센 재화에게 저 와인 정도는 취하지도 않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시선을 끄는 외모를 가진 남자가 저렇게 병째 술을 마시고 있으니 눈길이 모이는 건 당연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해 열리자마자 재화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플랫을 신고 있기는 했지만 오늘 새로 신은 데다 워낙 딱딱한 재질이라 순간 뒤꿈치에 생채기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아무렇지 않게 바로 재화의 뒤를 따랐다. 로비를 벗어나면서도 재화는 다시 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지 않아도 주말이라 북적이는 거대한 로비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 매니저의 역할이었다. 이미 재화의 차가 대기되어 있었고 따로 부른 건지 대리기사까지 와 있었다. 발렛 직원이 바로 뒷문을 열자 재화가 올라탔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가려는데 재화가 고갯짓을 했다. 결국 안쪽으로 들어가는 재화를 보며 해성이 그 옆으로 올라탔다.
원래 재화의 기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뀔 때가 많았다. 물론 기분이 좋을 때는 거의 없다고 해야 할까. 자리에 앉자 치맛자락이 올라가 허벅지 반 이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해성은 핸드백을 허벅지 위로 올리고 조금 더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이곳에서 집까지는 멀지 않았고 도착하기 전 재화는 기어이 와인을 모두 비워냈다. 병을 대충 바닥으로 던져두고는 차가 멈춰서자 대리기사에게 수표 한 장을 건넨 재화가 거칠게 차 문을 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보통 대리비의 몇 배나 되는 돈에 대리기사의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인사를 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인 해성은 이미 앞서 걷는 재화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불이 들어와 있는 버튼은 펜트하우스가 아닌 해성의 층수였다.
“같이 술 좀 마셔줄 수 있잖아.”
어차피 해성의 집에도 종류별로 술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건 이사를 왔을 때 이미 재화가 사람들을 시켜 채워 넣은 것 같았다. 딱히 술을 좋아하지도 않아 이제껏 단 한 병도 손을 댄 적도 없었다.
“그렇게 해, 그럼.”
어차피 냉장고도 길 여사가 제때 맞춰 챙겨 놓으니 안주가 될 만한 것들이 있긴 할 것이다. 술을 마실 거라면 아마 펜트하우스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을까?
“펜트하우스로 올라가는 게 낫지 않을까?”
“개 같은 향수 냄새가 더럽게 안 빠져서.”
그 향수 냄새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제 재화의 방을 치울 때 강한 향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마 수진이 향수를 쏟은 탓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향수라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엎지르면 그저 악취처럼 느껴졌다.
“일단 들어가.”
먼저 내린 재화가 자연스럽게 지문을 찍고 현관을 열었다. 이제껏 재화가 해성의 집에 온 적도 없었지만 들어오려고 했다면 언제든 들어올 수 있다는 것에 깨달았다. 정말 송해성은 위재화에게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들어가 재킷을 벗으며 소파에 자리를 잡은 재화를 보고선 해성은 바로 코트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쳤다. 싱크대에서 손을 먼저 씻은 다음 냉장고를 열어 그때그때 먹기 좋게 손질되어있는 과일 몇 종류와 치즈를 꺼냈다.
그것을 커다란 접시에 담고 돌아서는 순간 그대로 놓칠 뻔했다. 언제 온 건지 재화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화는 손을 뻗어 아일랜드 식탁 즉, 해성의 뒤쪽 장식장에서 위스키를 짚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단둘이 이런 공간에 있는 건 20살 이후로 처음이었다. 묘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해성은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며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한 번씩 재화는 멋대로 몸에 손을 대기는 했지만 절대 그 이상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직접적인 행위가 있었던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유야 뻔했다. 재화는 그날 장준의 귀에 들어갈 테니 하는 수 없이 해성에게 손을 댔을 것이다.
허나 재화가 저를 여자로 보는 건 아니었으니 그다음부턴 상관없었을 것이고. 물론 해성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재화에겐 화려한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더는 장준이 의심을 할 필요도 없이.
“옆으로 앉아.”
“얼음도 좀 가져올게.”
“그냥 마셔.”
알코올 40도의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 있을 정도로 해성은 술이 세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온더락 잔에 호박빛의 위스키를 채운 재화가 해성에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일단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을 마신 뒤 제대로 숨을 뱉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스 버킷을 찾아 제빙고에서 얼음을 가득 채워 가져온 해성이 자리에 앉으며 일단 잔에 얼음을 몇 개 넣었다. 아직도 목이 타는 것 같아 얼음 하나를 입으로 넣었다. 접대를 받거나, 회식을 할 때 분위기 탓에 몇 번인가 스트레이트로 마셔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얼음을 수십 개를 먹어야 했다.
재화는 반을 채운 잔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그리고 다시 잔을 채웠다.
“천천히 마시는 게 낫지 않아?”
“취하고 싶은 날도 있잖아.”
“원하던 부지도 확보했고, 단독 시공도 확정이 됐는데.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
“기분이 좋아서 취하고 싶은 거야. 워낙 송 과장이 일을 잘해줘서.”
그럼 말 그대로 이게 축하주라는 뜻인 걸까? 종잡을 수가 없는 기분 변화에 해성은 제대로 재화를 보필하는 게 1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그래도 중고등학교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성인이 된 뒤로 몇 년이나 떨어져 있었던 것이 그 간극의 차이를 벌린 듯했다.
당시 재화는 같이 유학을 가길 원했지만 장준과 해성은 아니었다. 아마 그때 유학을 거절했던 것에 재화가 심통이 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장준은 처음부터 해성이 재화의 것임을 확실히 했다. 하지만 그 유학 건만은 재화의 뜻에 따라주지 않았다. 그만큼 해성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회사에 들어와 해성은 장준의 기대 그 이상을 해주었다.
GF 엔지니어링이 확정되자마자 장준은 유학을 가라고 했지만 해성은 그것을 거절하고 대학원도 한국대로 결정했다. 대학원과 회사를 병행할 땐 하루에 잠을 4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으며 담당 교수도 박사 과정을 권유했지만 해성은 석사로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