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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민혁은 능글거리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말투엔 장난기가 잔뜩 배어있었고 표정도 가벼워 보였다. 그런 민혁의 말에 해성은 웃었지만 재화는 아니었다. 한심한 눈을 하며 민혁을 보고 혀를 찼다.
“아마 우리 고등학교 때 해성이 안 좋아했던 애는 손에 꼽을걸?”
해성은 민혁이 하는 말이 농담이 거의 80%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직접적으로 고백했던 사람은 없었다. 해성이 보고 있던 책에 쪽지를 꽂아 둔다든가, 책상 서랍에 선물 같은 것을 넣어 둔 사람들이 있긴 했었지만.
“다들 재화 눈치 보느라 고백도 못 했던 거지.”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재화가 몸을 편히 기대며 민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 눈치?”
“떡하니 늘 같이 등하교, 늘 같은 반. 누가 감히 위재화 눈치 보여서 해성이한테 고백을 해.”
“넌 내 눈치도 안 보면서 왜 안 했냐?”
“에이, 친구끼리 의리가 있지. 내가 어떻게 해? 그리고 너 몰라서 그렇지 나도 인기 되게 많았거든? 날 좋아해 주는 팬들을 위해서라도 공공재가 되어야지 어떻게 한 사람의 남자가 돼.”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민혁을 보고 해성이 또 따라 웃었다. 물론 소리를 내서 웃은 건 아니었지만 그냥 따라 웃게 됐다. 민혁의 말대로 확실히 민혁도 인기가 많았었다. 거기다 학생회장까지 하게 되면서 인기가 더 급증했다고 해야 하나.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그 당시 공부 외에는 관심이 없던 해성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일이었다.
“다행이네.”
“뭐가?”
“구멍 동서는 피해 가서.”
순간 누군가가 이 방의 공기를 확 얼리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던 민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리고 해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재화를 보았다.
정작 이 분위기를 만든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와인을 마시고 있다. 원체 이런 취급을 받는 것에 적응이 되어 해성은 그저 할 말 하지 않을 말을 구분해 주길 원했지만 대놓고 요구하진 못했다. 하지만 민혁의 얼굴은 붉어졌다. 저건 부끄럽다거나 쑥스러워 그런 게 아닌 화가 난 것이었다.
“위재화. 너는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 해?”
“돌려 말해? 친구끼리 한 여자 가지고 먹는 건 별로잖아.”
“지금 날 화나게 만들고 싶은 거야, 아니면 질투야?”
“그만하자. 재미없다.”
“시작한 건 너야. 뭘 그만해? 그리고 재미?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이야길…….”
“내가 어떤 집에서 자란 건지는 한민혁이 제일 잘 알 거고.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라고. 딱히 돌려 말하는 매너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아서.”
잔을 비운 재화가 해성을 한 번 보았다. 이미 뜻을 알아차린 해성은 다시 재화의 잔에 와인을 채우기 위해 병을 들었다. 그런데 민혁이 그것을 낚아챘다.
“해성이 넌 이런 말 듣고 화도 안 나?”
“안 나.”
해성의 말에 민혁이 당황한 듯 잠시 주춤거렸다.
“어차피 너희 모임 사이에서도 내가 위재화를 위해서 뭐든 다 한다는 거 소문 다 났잖아.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자존심을 가진다는 것은 중학교를 가기도 전에 버렸다. 부모에 의해 팔린 그 순간부터 송해성이라는 인격은 말 그대로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민혁은 영원히 이런 해성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뭐가 사실인데? 너희 부모님 빚 때문에 그렇게 팔려 와서 이때까지 개고생한 거?”
해성은 침묵을 지켰다. 여기서 말만 섞어봤자 괜한 에너지만 소모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민혁과 헤어지고 재화와 단둘이 남았을 때 어떤 심술을 부릴지 모를 일이었다.
“너 이제껏 하고도 남았어. 너 능력 좋은 건 이쪽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아. 우리 건설사에서도 너에게 제의 간 거 알고 있어. 원하면 도와줄 수도 있어.”
이런 식으로 구원자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나쁘진 않네.”
재화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민혁의 손에서 와인을 가져와 잔을 채웠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민혁이 허, 소리를 허공에 뱉으며 다시 재화를 보았다.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금화 토건 송해성 과장이 사실상 금화 토건 5년 사이에 100위권 들지도 못하던 도급 순위 20위권 안으로 올려놓았다는 거, 바보 아니고서야 다 아는 사실이야. 네가 맡은 GF 엔지니어링 출발도 사실상 송해성 과장이 다져놓은 거잖아.”
바로 실전으로 투입된 해성은 사업상 발생하는 채무를 줄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다. 일단은 2, 3년간 지지부진했던 도급 순위를 올려놔야 사업 확장을 하며 빚에 대한 탕감을 더 빠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눈이 부신 성장을 하며 예전의 양아치 이미지는 거의 지워진 상태였다.
“난 배운 대로 했을 뿐이야. 운이 좋아서 사업이 잘 풀린 거고. 내실 다져놓으신 회장님 덕분인 거지.”
“해성아.”
“송해성이 그렇다는데 민혁이 네가 더 열 낼 건 없잖아.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송해성 마음에 두고 있어?”
와인을 마시며 재화가 슬쩍 민혁을 흘겨보았다. 민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의자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능력만큼 대우 못 받는 게 안타까워서 그래.”
“그 대우는 내가 알아서 해.”
“어떻게? 노예처럼 부려 먹는 식?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상대는 생각도 않고 모욕하는 식?”
“이제껏 내가 송해성 대하는 것에 불만이면서 어떻게 참았냐?”
재화의 음성엔 비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민혁도 더는 분위기를 무겁게 끌고 갈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제발 그만 좀 하라는 해성의 얼굴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해성이 생각이 그렇다는데 내가 더 할 말이 없네. 해성이 너 그럼 하나만 약속해주라.”
“약속?”
“혹시라도 나중에 회사 옮기고 싶으면 재원 건설로 오는 걸로.”
그렇게 될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혁이 말하고 있었다.
“고려는 해볼게.”
그 말에 민혁이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화는 와인을 홀짝이며 두 사람의 대화가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도 되는 것처럼 피식거렸다. 잔을 내려놓고 깍지를 낀 손을 뒤통수로 대며 몸을 더욱 편하게 기대었다.
“약혼녀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