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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템을 잡고 잔을 올렸다. 보울 속에 담긴 와인의 붉은빛은 조도가 낮은 조명에 비춰서 그런지 색이 더 붉게 보이는 것 같았다. 장밋빛보다 더 붉은 마치 핏빛같이 보였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과실주엔 약해서 살짝 입만 대고 내려놓았다. 가격깨나 나간다고 하더니 약간 맛을 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향이 무척이나 깊고 풍부했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향이 깊었다.
“참, 해성이 너 연락은 받았어?”
“연락?”
“우리 학번들 커플 동반으로 모이기로 했는데.”
연합 동아리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회원을 받을 때 조건이 까다로웠다. 해성이 인맥을 위해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수석 입학자에 뒷배가 금화 토건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있는 집 자식들도 쉽게 들어갈 수 없다는 곳이기도 했다. 실제로 선배들부터가 대부분 사회 각층의 제일 높은 곳에서 주름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모임에 나가는 건 중요했다. 하지만 대부분 바쁘다는 이유로 1년에 한 번 정도나 얼굴을 비췄다. 선배나 후배들과 연락을 간간이 하고 지내지만 커플 동반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 자리에선 인맥을 더더욱 넓힐 수 있었으니까.
“해성이 너 남자친구 있지?”
“꼭 커플이어야 되는 거야?”
“예약을 그렇게 한다더라고. 혹시 없어?”
“없어.”
“없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다 만들어서 온대. 동성 친구라도 괜찮으니까 친구와 함께 와.”
아마 현아에게 함께 가자고 하면 무척이나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유명 기획사에 몸을 담고 있어서인지 그런 인맥들이 현아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예쁜데 왜 남자친구가 없지?”
웃으며 말하던 민혁이 슬쩍 고개를 돌려 재화를 보았다. 그리곤 재화를 위아래로 한 번 쓱 훑었다.
“옆에 맨날 재화 녀석 붙어 다녀서 그런 거 아니야? 너희 고등학교 때도 사귄다고 말 많았었잖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민혁의 머리는 꽃밭인 건지, 세상을 밝게만 보는 건지. 해성이 금화 토건에 종속된 이상 자유로운 연애 같은 건 꿈에도 꾸지 못했다. 아마 필요하다면 장준은 해성을 팔려 가는 결혼이라도 시킬 것이다. 하지만 어젯밤 재화와 이야기한 것으로 분명해졌다. 그녀의 목을 쥐고 있는 사람은 장준이 아니라 재화였다.
“그 연합 인맥들이 꽤 대단하다며? 내가 가야겠네.”
“이럴 줄 알았음 재화 없을 때 이야기하는 건데 그랬다, 그치?”
“한민혁은 내 친군지, 송해성 친군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런 게 어딨어. 둘 다 내 친구지.”
딱히 친구로 지낸 기억도 없는데 민혁은 한 번씩 저렇게 말해주곤 했다. 민혁에게 있어서 친구라는 범주는 꽤 넓은 듯했다.
“친구끼리 무슨 편을 가르고 그래. 너랑 해성이도 친구잖아.”
“어쩌냐. 나랑 송해성은 친구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재화는 슬쩍 고개를 돌려 해성을 보고 와인을 마셨다. 그런 말에 딱히 타격을 받지도 않고, 상처도 받지 않는다. 해성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다시 스템을 잡았다. 좋아하는 종류의 술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직접 재화가 따라주었으니 마음껏 마셔도 될 것 같았다.
와인을 한 번에 비워내자 이번엔 민혁이 다시 잔을 채워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와인인데 향 괜찮지? 이 정도면 가격도 적당하고, 맛도 좋고.”
남들에겐 한 달 월급에 맞먹을 정도로 가격이 나가는 가격임에도 민혁에겐 적당한 가격인 모양이었다. 이럴 때마다 투명한 벽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아무리 몸에 명품을 잔뜩 걸치고 있어도 그저 보기 좋은 허울에 불과했다.
민혁은 과하지 않은 차를 타고, 딱히 명품을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애초에 보고, 먹고, 경험해 본 것들부터가 남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장준에게 끌려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을 경험하지 않아도, 알지도 못했을 사람들이고 또 그런 세계였다. 어릴 땐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요즘은 어쩐지 한 번씩 회의감이 들 때가 있었다.
몇십억, 몇백억이 오가는 생활을 하다 보니 돈에 대해 어느 순간 무감해졌다. 실제로 분에 넘칠 만큼 많은 연봉을 받고 있고, 그 외의 부가적인 수입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없다는 게 이렇게 많은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맛있네.”
“진짜 남자친구 없어? 좋아하는 타입 같은 건?”
곤란하게 이런 건 왜 묻는 걸까. 베이스를 잡고 의미 없이 빙글빙글 돌리며 민혁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민혁의 표정이 짐짓 심각했다.
“예쁘고 좋을 나이잖아. 연애도 하고 그래야지. 내가 괜찮은 사람 좀 소개해 줄까?”
“송해성이 연애할 시간이나 있을까?”
어쩐지 재화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어차피 해성이 연애 같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건 재화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해성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딱히 연애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편이 맞았다.
“무슨 뜻이야?”
“이제 차장 달면 더 바빠질 거라서.”
해성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재화는 아직 그녀가 차장을 다는 것이 이르다고 했다. 그리고 승진을 시켜 주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오, 이번에 큰 건 성사시켰다더니. 승진이야? 해성아, 축하해. 그럼 내가 승진 기념으로 좋은 선물 하나 해야겠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 때도 그녀의 생일을 챙겨 준 사람이 민혁이었다는 것을. 물론 그 뒤도 마찬가지였다. 올해까지도 민혁은 그녀에게 생일 선물을 보내왔었다. 물론 개인 비서를 시켜서 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꽤 고마웠다. 해성 스스로도 자신의 생일을 잊고 지내는데 민혁의 선물을 받을 때마다 묘한 기분이었다.
“승진 선물은 무슨.”
말 그대로 승진이 선물이라는 뜻이었다. 잔뜩 비꼬고 있는 재화의 말투에도 민혁은 웃고 있었다.
“기대해, 내가 좋은 걸로 선물해줄게.”
“괜찮아.”
“딱히 필요한 거 없으면 내 마음에 드는 걸로 해도 되지?”
괜찮다는 데도 불구하고 민혁은 꼭 선물을 할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직 승진이 확정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민혁이 말하는 이상 재화도 그 말을 다시 돌리진 않을 것이다.
“한민혁. 뭘 그렇게 신경을 써.”
“아, 내가 말 안 했나?”
“무슨 소리야?”
“해성이가 내 첫사랑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