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롭히게 해줘-15화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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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주지 그랬어.”

“깜짝 놀래 주려고. 아, 이쪽은 나와 약혼한 박유주.”

“안녕하세요, 박유주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송해성입니다.”

재화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고 민혁과 유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성을 반겨주고 있었다. 해성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유주에게 인사를 하고 꽃다발과 베이커리 상자가 든 종이 가방을 건넸다.

“어머, 전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약혼 축하드려요.”

“해성이는 여전히 센스가 좋네. 일단, 앉자.”

민혁은 자연스럽게 재화 옆자리의 의자 뒤에 서서 해성의 코트를 받고 앉기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매너가 좋은 건 여전했다.

“아, 고마워.”

“재화가 사람 많은 거 안 좋아해서 직원들은 내보냈거든. 내가 이렇게 해야지. 참, 주문을 알아서 했는데 괜찮지? 따로 못 먹는 건 없고?”

“응. 아무거나 잘 먹어.”

물론 좋아하지 않는 음식들도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그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선 대충 씹지 않고 삼킬 때도 있었다. 덕분에 체해서 꽤 고생을 한 것도 적지 않았다.

막 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리는데 자신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는 재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 그녀의 차림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 건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해성이는 우리 고등학교 내내 1등 놓치지 않은 수재. 지금은 금화 토건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 아마 능력대로라면 이미 사장 자리에 앉았어야 할걸?”

“와, 대단하시네요.”

“아닙니다.”

“아, 유주는 우리보다 4살 어려. 지금 졸업반이고. 플룻 전공. 그러니까 해성이 너도 말 편하게 놔.”

민혁의 말을 듣고 해성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24살의 유주는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키 차이가 그렇게 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168cm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워낙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저렇게 민혁의 옆에 앉아 있으니 더 작아 보였다.

“저도 언니라고 편하게 불러도 되죠?”

“그럼요.”

“그냥 말 놔요, 언니.”

“천천히 그렇게 할게요.”

딱 대학생 그 특유의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물론 해성은 그런 대학생이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그때 친구들은 저렇게 유주처럼 보였다.

민혁은 다정한 성격답게 유주의 옆에 앉아서 잘 챙겨주었다. 그러면서 해성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테이크까지 나왔는데도 재화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행히 유주가 꼭 병아리처럼 쫑알대며 말을 많이 해서 분위기는 그런대로 부드러웠다.

“잠깐 실례할게요.”

유주가 핸드백을 챙겨 들자 민혁이 더 빨리 일어나 편히 일어날 수 있게 의자를 뒤로 당겨주고 함께 룸에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방금 전의 그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꼭 없던 일처럼 느껴졌다.

“무슨 소리야?”

“뭐가?”

“오늘 또 만난다는 건.”

“아, 어제 사무실 올라가기 전에 주차장에서 잠깐 만났어.”

“왜 말 안 했는데?”

“잊고 있었어.”

재화는 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해성은 또 꼬투리를 잡힐 건수를 하나 주었다고 생각했다.

“기껏 골라 입은 게 그게 다야?”

“다들 무채색 계열이라 이게 최선이었어.”

“사람을 바꿔야겠네.”

“이번 신상이 아마 무채색 계열일 거야.”

옷 하나 이렇게 입었다고 해서 사람을 바꾸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재화에겐 일할 사람을 자르고 뽑는 건 그냥 티슈를 뽑고 버리는 정도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아니었다.

재화는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모자람 없이 자랐다. 뭐든 게 넘쳐났고,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금화 토건의 ‘도련님’ 혹은 ‘왕자님’으로 자랐으니 결핍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간절함도.

“센스 좋은 사람이야.”

“송해성 마음에 들었나 봐?”

그다지 깊이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입이 무겁고, 필요한 말 외에는 딱히 하지 않아서 그게 해성의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 것까지야. 얼굴 몇 번 본 게 단데.”

만약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면 분명 재화는 사람을 바꿀 것이다. 예전부터 재화는 해성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들은 모조리 싫어했으니.

“그래도 좀 바꾸는 게 낫겠어. 내가 한 브랜드만 이야기했다고 그것만 주구장창 입히는 것도 센스가 떨어지는 것 같네.”

분명 이 브랜드만 콕 집어 말하기는 했다. 그리고 해성은 재화가 유난히 이 브랜드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그건 퍼스널 쇼퍼도 마찬가지였다. 하여간 변덕은. 어차피 이미 재화가 저렇게 말을 한 이상 결국은 바뀔 것이다. 괜히 여기서 더 말을 꺼내 보았자 피곤해질 뿐이라 해성은 입을 다물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민혁이 들어왔다. 그리고 민혁의 손에 들린 건 가격이 꽤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 와인이었다.

“다들 한 잔씩 괜찮지?”

딱히 오늘은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다. 아마 재화도 그녀가 술을 마시는 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 병을 받아 든 재화는 가볍게 코르크를 빼내고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 유주는 술 못 마시니까 안 채워도 돼.”

해성은 자신의 잔에 와인을 따르는 재화를 보며 베이스 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해성이 민혁에게 물었다.

“유주 씨는?”

“잠깐 전화 받고 들어오겠대. 일단 우리 셋이라도 잔 맞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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