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꽤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재화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깔린 음식은 한가득이고 배는 채워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은 좀 더 먹어두는 게 좋았다. 해성은 잘 발라진 보리굴비를 밥 위에 올리고 입이 가득 차게 집어넣었다.
“이미 부모가 진 빚은 몇 배나 갚고도 남았을 텐데.”
씹던 것을 잠시 멈췄다. 재화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아니,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몰랐다.
“이제 변제 의무 끝났다고 영감한테 말해 본 적 없나 하고.”
입 안에 가득 든 밥을 꼭꼭 씹어 집어삼켰다. 꼭 입 안에 있는 게 장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꼭 씹었다.
“이자가 가득이야.”
“이자?”
“그때 회장님이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면 교육은 무슨, 어느 정도 여자 태가 나면 몸이나 팔게 됐겠지.”
그 말에 재화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영감은 절대 그렇게 할 생각 없었을걸. 영감이 똑똑한 인간한텐 간이고 쓸개고 그냥 내놓잖아.”
“기껏 11살 먹은 어린애였어. 영재 교육은 받고 있다지만 미래가 불투명한.”
“배팅에 성공한 거지. 실패했다면 영감 성격에 다리 벌리는 푼돈? 배를 갈라서 장기라도 죄다 팔았겠지.”
이럴 때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금화 토건의 전신이 무엇이었는지. 금화 토건을 인식하기 전까지 장준은 불법적인 일은 서슴지 않는 양아치였으니까. 살인이나, 시체유기까지도 말이다.
“어쨌거나 회장님이 돌아가실 때까진 끝나지 않는 일이야.”
“하루빨리 영감이 칼 맞아 뒈지라고 정수라도 떠 놓고 빌어야 하는 거 아니야?”
10대와 20대의 거의 대부분을 금화 토건을 위해 살았다. 물론 성인이 되면서 책임감은 더 막중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희망조차 꺾였다. 금화 토건에서 벗어나는 것을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재화가 저렇게 말하는 것도 어쩐지 신선하게 다가왔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영감이 죽으면?”
해성이 살짝 시야를 좁혔다. 지금 재화의 의중을 모르겠다. 떠보는 건지, 솔직하게 말하라는 건지.
“그렇게 되면 나도 떠나야지.”
“누구 마음대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재화는 등받이에 편히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영감은 널 내게 줬어. 넌 위장준이 아니라, 위재화 거야.”
비릿하게 웃으며 재화가 쐐기를 박았다.
*
신상으로 보이는 옷들 중 그래도 쇼퍼가 1년간 보아온 해성의 스타일을 잘 아는 모양인지 대체적으로 얌전한 느낌의 옷들로 가져다 놓았다. 그나마 재화가 말했던 화사한 톤이라는 건 라즈베리 톤의 원피스뿐이었다.
상의는 버튼을 채워 단정하게 잠그고 얇은 벨트도 함께 허리에 걸쳤다. 화이트 톤의 코트까지 걸쳐 입고야 집을 나섰다. 재화가 알려준 장소는 집과 매우 가까운, 즉 민혁이 바로 어제 주었던 파인다이닝이 있는 호텔이었다.
J호텔은 민혁의 어머니가 운영 중인 곳이었는데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현아도 생일에 한번 예약해보고 싶다던 호텔 내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어차피 돌아올 때는 재화의 차를 운전해야 할 테니 해성은 망설임 없이 아파트 로비를 벗어나 택시에 올라탔다.
장소를 말하자마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당연히 재화겠거니 했는데 의외의 인물이었다.
“네, 사모님. 해성입니다.”
[해성이 어디니?]
“본부장님과 약속이 있어 가는 중입니다.”
[걘 주말에도 일 시키니?]
“아닙니다. 재원전자 한민혁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그럼 오늘은 시간이 안 되겠고. 내일은 좀 괜찮니?]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우리 영화 때문에 못 산다. 내가 뭘 알겠니. 와서 애 성적표 좀 봐줘. 얘, 지금 등수가 훅 떨어졌다는데.]
“알겠습니다. 제가 2시 이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영화는 이제 중3으로 올라가는 장준의 막내딸이었다. 1년 전까지는 그래도 해성이 한남동에 살면서 필요할 때마다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꽤 똑똑하기도 했고, 곧잘 따라오기도 했는데 1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장준이나 소연이라면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을 텐데.
통화를 끊고 고개를 돌렸다. 오늘 오후 내내 잿빛의 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남기지 않은 올해의 첫눈이었다.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하자 해성은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차에서 내렸다. 눈이 내려서인지 다행히 생각보다 날은 춥지 않았다. 게다가 한두 송이 날릴 정도로 쌓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호텔은 무척이나 붐비고 있었다. 게다가 저녁 시간이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이 15분 정도 남아있었다. 그래도 민혁의 약혼녀를 처음 만나는 날인데 빈손으로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 미리 사놓았던 꽃다발을 가지고 왔는데 덜렁 이것만 주기에도 신경이 쓰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베이커리로 향했다. 저녁 시간이기는 했지만 워낙 여러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베이커리도 복잡했다. 진열 되어 있는 다쿠아즈와 마카롱을 선물용으로 빠르게 포장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약속 시간은 5분이 남아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계산만 하고 나올 예정이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셨습니까?”
“한민혁 씨라고 되어 있을 거예요.”
“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민혁의 이름에 직원의 영업용 미소가 더 화사해졌다. 역시 사람이 가지는 힘은 그런 모양이었다.
“이쪽입니다.”
직원이 바로 옆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그 뜻은 이미 누군가가 와 있다는 소리였다. 문이 열리자 검정 터틀넥 차림의 재화와 눈이 마주쳤다.
“도착하셨습니다.”
직원이 허리를 숙인 뒤 다시 문을 닫았다. 커다란 통창 너머로는 한강의 야경이 보였고, 재화는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재화의 앞으론 민혁과 약혼자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오늘 또 만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