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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있는 지인에게 부탁했습니다.”
“지인?”
“네. 대학 동기입니다.”
고3 때까지는 어떻게든 한국대에 최고 성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교우 관계에 소원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앞길이 정해졌다는 생각에 인맥이 중요해질 것이라 예상했다. 학점 유지도 중요했고, 인맥 관리도 중요했다. 그래서 입학을 하자마자 한 건 연합동아리에 가입한 일이었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려면 그 방법이 제일 빨랐다.
복수 전공을 하면서도 동아리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해성을 보고 대체 잠은 언제 자는 거냐며 대단하다고 할 정도였다. 아마 공학이 아니라 설계를 전공했다면 힘들었겠지만 그땐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리고 그때 잠을 아껴가며 쌓은 인맥을 아주 잘 이용하는 중이었다.
“최후의 수단이었어?”
“아닙니다.”
“그럼 더한 게 있는데 일주일이나 시간을 더 달랬다고?”
“시간이 있었으면 굳이 아들 일이 아니더라도 회유할 수 있었을 겁니다.”
“가족까진 건들고 싶지 않았다?”
해성은 침묵했다. 그녀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존재였다. 빚을 볼모로 금화 토건에 팔린. 지금은 그 부모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재화는 그런 해성이 퍽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가족이라면 없던 증오라도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성은 가족 이야기에 꽤 약했다. 어쩌다 그런 인간들을 부모라고 만나 저런 꼴이 됐는지. 본인도 꽤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해성에 비하면 뽑기에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차장 달기엔 이르지 않나?”
장준이 그녀를 차장으로 올리겠다고 해도 재화가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말이 이사진들이었지 어차피 이 회사는 장준 독주 체제로 돌아가는 회사였다. 도급 순위가 올라갈수록 이리저리 나뉘고 있었지만 어차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위장준 가족들의 지분이 90%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네.”
“과장으로 말 안 통하는 곳 있었어?”
“없습니다.”
있겠는가. 송해성이라고 하면 위재화의 개새끼로 유명한데. 어차피 해성이 움직이면 재화가 움직이는 것이라고 봐야 했다. 물론 한 번씩 개중 해성을 모르고 여자라며 코웃음을 치는 곳들이 있긴 했었지만. 오늘 접대를 했던 바로 그 시공업체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 곳은 그녀가 차장을 달든, 이사가 되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쪽 일이 원래 거칠다는 것도, 여자들에게 박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오죽하면 대학 시절 교수도 그녀의 성별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게다가 바로 금화 토건에 취직됐다는 말에 제발 유학을 생각해보거나, 우리나라 최고 건설 회사를 지목하며 얼마든 넣어줄 수 있다고 지도 교수나, 부교수까지도 그녀를 잡고 내내 이야기를 했을 정도였으니.
“여자라 무시하는 곳만 있다?”
재화가 도미회를 간장에 찍으며 물었다. 아마도 장준이 그에게 말도 없이 그녀를 차장 자리에 올린다고 해서 신경이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누구보다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회사가 더 커야겠네. 우리 송 과장님 감히 무시 못 할 정도로.”
금화 토건이 여기서 더 크든, 유지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금화 토건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몸이었다. 비꼬는 말투를 들으며 해성은 광어를 씹었다. 유난히 차진 광어는 꼭꼭 씹어야 했다. 마치 한겨울에 먹는 것처럼 차진 식감이었다.
“내일 민혁이랑 약속 있어.”
“스케줄 확인 바로 하겠습니다.”
종일 외부에 나가 있었고, 바로 끌려 나오느라 확인하지 못했다. 이번 주는 유난히 일에 시간을 많이 쏟아서 피곤했다. 게다가 건강검진도 있었고. 뭐라도 아예 크게 걸렸다면 핑계를 대고 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상이 없었고, 담당의 역시 아주 좋은 상태라고 말해주었다.
“됐으니 쉬어.”
막 젓가락을 움직이려던 해성이 그대로 멈췄다. 민혁이 지저분하게 놀기 유명한 사람들 틈에서 유일하게 깔끔할 정도인지라 재화도 단둘이 만날 때면 크게 해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다행히 내일은 민혁과 단둘이 만나는 모양이었다.
“저녁엔 좀 나오고.”
“네.”
“약혼한 여자 소개하는 자리야.”
민혁이 약혼을 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재원전자 측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딱딱하게 입지 마.”
“네.”
“집으로 몇 벌 보냈으니 화사한 걸로 골라 입어.”
“그러겠습니다.”
민혁은 아마 약혼녀를 배려해서 직접 재화에게 혼자 나오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아마 오늘 수진의 선물을 그렇게 던지지 않았더라면 해성이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아의 말대로 차라리 빨리 장준이 정치계 거물의 딸이든 손녀든 데리고 와 재화와 약혼이나 결혼을 시켰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전에도 한번 말한 거 같은데 회사 이외엔 그 짜증나는 존대 좀 때려치우라고.”
분명 한 번 말하긴 했다. 그건 재화가 귀국해 바로 직속 상관이 되고 한 달이 좀 되지 않았을 때쯤이었다. 하지만 거의 대체적으로 회사 일로 같이 마주할 때가 많으니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계속 존대를 써도 재화 역시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는데 이렇게 한 번 더 꼬집어 말하는 것을 보니 그동안 계속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주의할게. 그렇게까지 거슬려 할 줄은 몰랐네.”
“어차피 서로가 그렇잖아?”
“무슨 뜻이야?”
“서로 존재 자체가 거슬리잖아.”
한 번씩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긴 했다. 어려서부터 재화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재화의 유학 생활 기간 동안 보지 못했고, 성인이 되어 제대로 마주 선 건 그가 귀국을 하고 나서부터였다.
이젠 더 이상 학생 때의 생각 같은 것은 할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원래 인생이라는 건 불공평한 것이다. 출발선이 다르니 서로의 위치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해성에게 재화는 말 그대로 ‘도련님’이었기 때문에 거슬리는 존재인 것이고, 재화에게 해성은 ‘굴러 들어온 돌’이기 때문에 거슬리는 존재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 굴러 들어온 돌이 능력이 좋음으로써 더 거슬리는 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그래? 의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