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롭히게 해줘-12화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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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마셔.”

고개를 살짝 숙인 해성은 몸을 돌리고 스트레이트 잔 가득 채워진 위스키를 한 번에 비워 삼켰다. 뜨거운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코끝으로 진한 오크통의 향이 느껴졌다. 깔끔하게 잔을 비운 해성은 입이 닿았던 곳을 손바닥으로 닦아내고는 장준에게 건네주었다.

“이번 일을 아주 그럴싸하게 해서 이젠 누구도 송 과장을 차장 자리에 올리는 데 지랄 못 할 거야, 그렇지?”

“과찬이십니다.”

이번 일이 정말 크긴 한 모양이었다. 장준이 대놓고 차장 자리를 약속할 정도였다니. 해성은 방금 돌려준 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웠다. 이런 건 일상적인 일인 듯 해성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병을 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처음 재화의 양옆으로 앉던 여자들은 이미 거절의 뜻을 받고 한 명은 장준에게, 다른 한 명은 시공업체의 사장에게 붙었다.

재화는 몸에 불필요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술을 잘 마시지도 않았다. 물론 한 번씩 마실 때면 거의 술집을 거덜 낼 듯이 마시곤 했지만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 위 본부장도 한 잔 받아. 오늘 고생했어.”

장준이 위스키병을 들었다. 하지만 재화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킷의 단추를 정리했다.

“피곤해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딱딱한 놈.”

재화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뒤 바로 룸에서 빠져나갔다. 해성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재화가 나갔으므로 해성이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잠깐, 송 과장.”

막 고개를 숙이려고 할 때였다. 장준이 딱, 소리를 내며 손짓을 하자 완섭이 다가왔다. 해성은 그저 무감한 얼굴로 소파 위에 있던 가방을 들었다.

“내 지갑.”

그 말에 완섭이 바로 장준에게 두툼한 지갑을 건넸다. 장준은 지갑에서 수표를 가득 집어 해성을 향해 밀었다.

“아닙니다, 회장님.”

“이걸로 가방이라도 하나 사.”

“감사합니다.”

장준은 두 번 이상 거절하는 걸 싫어했다. 해성은 장준의 손에 들린 수표를 받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인내심 없는 저 꼴통 새끼 더러운 성질 피우기 전에 나가봐. 그래, 하나는 이제 위로 올라와.”

해성의 인사도 대강 받으며 장준은 바로 앞의 여자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해성은 보는 사람이 없어도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선 돌아섰다. 가방으로 대충 수표를 집어넣으며 룸에서 나오자 긴 복도 앞으로 삐딱하게 서 있는 재화가 보였다.

재화의 옆을 조심히 비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꼭 이곳이 런웨이 같다고 느껴졌다. 사람들은 힐끔대며 재화를 훑었다. 어느 곳에 있든 확실히 눈에 튀는 사람이었다.

“배고파.”

“바로 연락 넣겠습니다.”

이미 재화와 함께 이곳에 도착했을 땐 광란의 접대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재화가 바로 해성을 데리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식사만 했더라면 해성을 굳이 데리고 오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다.

공복인 상태의 재화는 어딘지 조금은 성격이 날카로워졌다. 보통 사람들이 다들 그렇겠지만 재화는 공복 상태에 유난히 예민했다.

호텔 바로 근처의 한정식집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물론 보통 사람이 예약을 하려면 몇 개월이 걸리는 곳이었겠지만 금화 토건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바로 전화를 끊은 해성은 서둘러 재화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로비 밖으로 나오자 바로 재화의 차가 대기 되어 있었고 직원은 자연스럽게 차 키를 해성에게로 내밀었다. 하지만 재화가 바로 키를 낚아채며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해성은 직원이 문을 여는 보조석으로 올라탔다. 보통 장준은 그런 식으로 술을 마시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위스키를 한 잔 마셔 해성이 운전을 하지 못하게 됐다.

재화는 해성과 함께 있을 때 운전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대부분 이런 일이 생기면 대리를 부르곤 했는데 바로 운전대로 앉는 것을 보니 지금은 공복 상태라 확실히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RPM이 올라가며 재화의 차가 거칠게 도로 위로 합류했다. 금요일의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도로는 제법 막히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차로 3분도 걸리지 않았겠지만 거의 15분 이상을 허비한 뒤에야 식당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재화가 직원이 오기도 전에 차 문을 거칠게 열고 먼저 내렸다. 보통의 공복 상태보다 훨씬 더 예민했다. 또 어느 부분에서 저렇게 예민해진 건지 해성은 벌써부터 위장이 뜨끔하며 결리는 느낌이었다.

늘 가는 방으로 들어서자 이미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재화는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음식들이 차려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도 평소엔 꽤 시간을 주고 미리 예약을 했고, 갑자기 예약을 하더라도 보통 이동 시간까지 1시간 정도는 걸려 별다른 탈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갑작스럽게 오게 된 것이었는데 이 정도라면 꽤 준비가 훌륭했다.

“5분 내로 모든 음식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은 주인이 아닌 해성이었다. 해성이 미안한 마음을 표정으로 건네며 살짝 웃었다. 주인은 괜찮다는 얼굴로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재킷을 벗어 대충 던져 버린 재화가 자리에 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내고 바로 숟가락을 들었다. 해성은 재킷을 들어 걸어두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놔두고 앉아.”

평소 같았으면 네, 말하고 바로 재킷을 정리한 뒤 앉았겠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해성은 바로 재화의 건너편으로 앉으며 가방을 놓고 물수건을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재화는 미리 손을 씻고 오거나, 물수건으로 손가락 하나, 하나씩을 깨끗이 닦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꽤 오래 공복 상태가 지속된 모양이었다.

젓가락을 든 재화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식들을 입으로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화가 음식을 먹을 때 게걸스럽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음식 냄새가 올라오자 해성 역시 오늘 종일 공복에 위가 이제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숟가락을 들고 고운 빛깔의 호박죽을 떠먹었다.

늙은 호박 특유의 고소한 맛이 올라왔다. 언젠가 주인이 해성이 호박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따로 싸준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그녀가 오면 송이죽 대신 호박죽을 올려주곤 했다.

정확히 5분 뒤, 직원 넷이 들어와 순식간에 빈자리를 음식들로 가득 채웠다. 해성은 시계를 보았다. 9시 55분. 이곳은 정식 영업시간이 오후 10시까지지만 오늘은 퇴근이 꽤 늦을 것 같았다.

표고버섯 전을 들어 한입 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반쯤 남은 전을 내려두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대충 배가 채워진 건지 재화가 음식을 씹으며 해성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뭘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들 새끼 약 한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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