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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슨 개 같은 소리만 들리나 보네. 이완섭 그 새끼가 이상한 말 뱉은 거 아니야?”
완섭의 이름이 나오자 해성이 티가 나지 않게 입술 안쪽의 살을 슬쩍 깨물었다. 어쨌거나 뱀 같은 눈을 가진 완섭은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쾌했다.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
불쾌한지 재화가 인상을 구기며 쯔, 소리를 냈다. 재화는 또래로 보이지 않았다. 아주 깔끔하게 잘 꾸민 20대의 청년처럼 보였다. 워낙 타고난 인물인 탓도 있겠지만 또래보다 훨씬 성숙해 보이고, 눈에 튀는 사람이었다.
“벗어.”
저도 모르게 재화를 살피듯 보고 있는데 들려온 목소리에 주먹을 꽉 쥐었다. 하얗게 질린 주먹을 본 재화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개 같은 말들이 떠도는 것도 불쾌한데 고자라는 소문까지 나면 곤란하잖아?”
오늘은 평소처럼 그냥 넘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해성이 단정하게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소파 위로 내려놓았다. 재화가 눈짓으로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다리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추를 발목에 달고 있는 것만 같다. 잔뜩 굳은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여 재화의 앞으로 걸어가 섰다.
“누가 범생이 아니랄까 봐. 바지랑 조끼도 벗어.”
추울 땐 늘 따뜻하게 입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에 따라 되도록 잘 겹쳐 입는 편이었다. 그게 재화에겐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조끼까지 벗어 내려놓자 재화의 시선이 그녀의 상체에 고정되었다.
흰 셔츠는 몸에 거의 붙어 가슴의 윤곽이나 어깨까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재화의 앞에서 평정심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시간을 앞으로 빨리 감고 싶을 정도였다.
“올라와.”
그렇게 말하며 재화는 자신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해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잠시 망설이던 해성은 왼쪽 무릎을 먼저 재화의 오른쪽 다리 옆으로 올렸다. 그리고 다른 무릎을 내리기도 전에 재화가 그녀의 스카프를 잡아 확 이끌었다.
망설이고 있던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마치 개 목줄을 움켜쥐고 조절하는 것처럼 재화는 스카프를 잡고 힘을 주고 있었다. 재화의 허벅지 위로 앉게 되자 셔츠가 아슬아슬하게 속옷을 가리고 있었다. 조금 더 움직인다면 속옷이 고스란히 보일 것이다. 아니, 이미 재화의 시선에선 그녀의 속옷이 보일지도 몰랐다.
“세워.”
“뭐?”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물음에 재화는 또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럼 쳐다보는 것만으로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손목이 잡혔다. 그리고 그대로 끌려간 손바닥은 그의 다리 가운데였다. 일어서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트레이닝복 바지가 솟구쳐 있는 게 보였다. 게다가 재화의 힘에 의해 조금 더 힘이 눌러지자 딱딱함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해성은 새빨개진 얼굴로 그저 입술만 몇 번이나 질겅 씹었다. 굳은 채로 손바닥은 여전히 쫙 편 상태였다.
“처음이야?”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덜 억울하겠네. 나도 오늘이 처음이니까.”
해성이 고개를 드는 순간 잡힌 손목이 그의 바지 안으로 쑥 들어갔다.
“뭐, 빨려보긴 했지만.”
그 소리에 흠칫거리며 해성이 몸을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손으론 스카프가 잡혀 있어 약간의 반동만 줬을 뿐 물러서지 못했다.
“쥐고 흔들어. 그 정도는 상식으로 알 거 아냐.”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재화의 손이 빠져나갔다. 어쩔 줄 모른 채 손바닥을 펴고 있던 해성이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힘 좀 더 줘도 돼.”
해성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재화의 표정은 큰 변화가 없다. 아니, 귓가가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주자 재화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리고 볼 근육이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보니 이에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재화의 말처럼 조금 더 힘을 주어 잡은 뒤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재화가 바지 안에서 해성의 손을 꺼냈다. 다행이라 생각할 새도 없이 해성의 손을 든 채로 손바닥을 혀로 핥았다.
뜨거운 혀가 손바닥을 핥자 해성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어쩐지 묘한 느낌이다. 뜨겁고 부드러운 혀가 그녀의 손을 천천히 핥고,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허공에 떠 있는 다리 사이가 저릿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허벅지에 힘을 주자 재화의 다리가 더욱 딱딱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을 적신 재화가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내려가.”
약간 쉰 듯한 재화의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다. 이대로 내려가도 되는 건가, 싶어 슬쩍 재화의 표정을 살폈다. 흥분에 의한 사정인 것인지 재화의 광대뼈 부근이 살짝 붉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인지 재화를 살짝 내려보는 시각이었다. 짙은 쌍꺼풀 아래로 깔린 속눈썹은 그의 얼굴에 그늘을 만드는 것 같았다.
“안 내려가? 왜? 박혀 보게?”
그 순간 정신을 차린 해성이 손을 떼고 조심스럽게 재화의 다리 위에서 내려갔다. 여전히 손은 젖어 있어 찝찝함이 가득했지만 멋대로 닦을 수도 없었다.
“당신 아들 여자한테만 잘 반응하고 잘 싼다고 말씀드려. 개 같은 상상 그만하시라고.”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재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해성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린 해성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03.
장준과 저녁 약속이 있다는 말에 셋이서 먹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접대인 모양이었다. 이번에 창원 아파트 부지의 시공업체로 선정된 곳이었는데 깨나 거한 접대를 준비했고 그게 또 재화의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준은 출신이 그래서인지 이런 접대에 거부감도 없었고, 오히려 즐기는 것에 가까웠다. 예전엔 소연을 생각하면 안쓰러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각도 달라졌다. 소연은 장준의 돈을 사랑했고, 또 따로 만나는 애인도 있었다. 아마 소연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은 장준을 빼고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 우리 송 과장. 이번 월급 기대해.”
“감사합니다.”
이미 용인 부지의 계약건이 장준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해성은 잔을 들고 장준이 따라주는 위스키를 보았다. 한 병에 천만 원을 호가한다는 것이었고, 술을 즐겨하지 않는 해성은 그저 맛보는 것으로 족한 브랜드였다.
시공업체 측은 이런 자리에 여자가 있는 게 처음엔 여간 불편한 게 아닌 것처럼 행동하더니 장준이 해성을 대하는 것을 보고 이젠 여자가 아닌 대등한 관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미 접대 장소는 무르익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