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롭히게 해줘-10화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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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아들뻘에 불과한 태화에게 이런 식으로 해성의 앞에서 모욕을 당해서 그런지 아니면 아파서인지 완섭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시뻘건 색이었다.

“내가 아무리 빡대가리에 회사 돌아가는 꼬라지는 잘 모른다고 해도 해성이가 어떤 자리 차지할지는 잘 알고 있거든?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랬지.”

시화와 태화는 그녀가 처음 왔을 때부터 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아마 친언니나 친오빠가 있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

“이게 무슨 소란이야?”

서재 문을 열고 나온 장준이 세 사람을 보았다. 몇 번인가 분위기를 훑던 장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해성이는 가 보고 두 사람은 따라 들어와.”

“네.”

해성이 깍듯이 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태화를 향해 가볍게 웃고는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바로 차고로 향해 잠시 고민을 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3주 만에 운전면허 시험을 따기는 했지만 이제껏 실제로 연수를 받은 건 세 번뿐이었다. 면허가 나오고 고작 일주일이 지난 말 그대로 초보였다.

재화는 면허를 따자마자 처음부터 운전을 했던 사람처럼 아주 능숙하게 운전을 하고 다녔지만 워낙 조심성이 많은 해성으로서는 바로 운전을 하는 게 불가능했다. 장준은 바로 운전을 해야 빠르게 는다며 운전면허 시험장을 다니는 와중 이미 두 사람의 차를 차고에 들여다 놓았었다.

“하.”

잠시 고민을 한 해성이 결국 택시를 불렀다. 아무리 어려서부터 어려운 일에 단련된 인간이라 할지라도 오늘 해야 하는 일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보았던 별채에서의 여자들이 혹은 남창이라 불리던 남자들이 해야 했던 일을 해성이 해야 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위재화에게.

언젠간 일어날 일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었을 때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번씩 간헐적으로 떨려오는 손가락을 몇 번이나 그러쥐어야 했다.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것쯤 살아남기 위해선 아무것도 아니라고.

*

택시 기사가 친절하게 계산을 하고 카드를 돌려주었다. 카드를 받은 뒤 택시에서 내린 해성은 높은 건물을 올려보았다. 이번에 금화 토건에서 처음으로 짓게 되어 분양하게 된 주상복합 아파트라고 했다. 이렇게 보니 새삼 재화가 얼마나 저와 다른 세계에 있는 인물인지 실감이 되었다.

아파트 입구 앞에 서서 카드키를 대자 유리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워낙 고가의 분양가에 나온 곳이라 그런지 인테리어부터 보통의 아파트와 달랐다. 게다가 안내 데스크가 따로 있었다.

로비에서 잠시 망설이는 해성을 보고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아, 여기로 가고 싶은데.”

이런 건물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봉투 속 쪽지에 적힌 주소를 보여주자 순간 직원의 얼굴이 더욱 밝아지며 더더욱 친절해졌다.

“A동은 이쪽입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역시 회사 지분인 곳인 모양이었다. 해성은 애써 웃어 보이며 직원의 뒤를 따랐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직접 층수 버튼까지 누른 직원이 다시 밖으로 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이 닫혔다.

누가 보아도 엘리베이터 공간 역시 넓었으며 금빛으로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해성은 꼭 갇힌 감옥 같다 생각했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엘리베이터는 고속으로 순식간에 올라가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문이 열렸다. 한 번 숨을 고르게 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해성은 바로 앞에 있는 현관을 보았다. 이 층엔 한 가구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키를 대려고 하다 혹시나 싶어 초인종을 눌렀다. 1분 이상을 기다려도 아무런 기척이 없어 결국 키를 대고 문을 열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중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대리석 바닥에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공간이 보였다. 슬리퍼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창 너머로 한강이 보였다. 워낙 높은 곳이라 그런지 그렇게 넓은 한강도 좁아 보이는 것 같았다.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워낙 넓은 공간이라 그런지 무엇인가가 꽉 차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모델하우스를 조금 더 깔끔하게 만들어 놓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해성은 잠시 고민을 했다. 먼저 씻고 나서 침실에 앉아 있어야 할지, 그냥 소파에 앉아 재화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그동안 별채를 오갔던 많은 손님들은 각자의 취향이 달랐다. 말 그대로 결벽증처럼 깔끔을 떨어대며 여자의 몸을 닦아내며 섹스를 하는 사람, 씻지 않은 채로 들러붙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핥는 사람, 묶인 채로 괴롭힘을 즐기는 사람 등등.

해성은 오랜 기간 재화를 알고 지냈지만 재화의 성 취향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소파에 앉아 재화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오렌지 색감이 인상적인 소파는 워낙 새것이라 그런지 포근한 느낌보다는 딱딱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읽을 책이라도 가지고 왔어야 했다.

아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는 게 나았다. 어차피 책을 펼치고 있더라도 활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무리 스스로의 인생을 포기하고, 어차피 금화에 속한 부품 하나라고 생각하더라도 인간은 인간인지라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월 패드에서 울리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묘한 불안감 또한 어디서부턴가 쫓아와 다리를 타고 올라와 스스로를 집어삼키는 느낌이다.

재화가 올라오는 시간까지가 억겁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디지털 음과 함께 곧 움직이는 소리가 귀를 뚫었다. 긴 복도를 따라 들어온 재화의 시선이 짧게 해성을 훑고 곧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쭉 뻗은 긴 다리를 테이블 위로 올려 발목을 교차시키고 등받이에 몸을 편하게 기대며 눈을 감았다. 운동을 하고 씻고 온 건지 간단한 차림에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다. 격한 운동을 하고 온 건지 피곤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눈을 살짝 뜬 채 고개를 왼쪽으로 튼 재화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무감한 얼굴로 묻는 재화의 목소리는 마치 ‘날씨는?’이라고 별것 아닌 것처럼 묻는 것 같았다. 그만큼 재화에겐 익숙한 일이었던 것이다. 장소가 바뀐 것을 빼고는.

“날 기다리게 할 리는 없고. 피곤하니까…….”

그때 재화의 목소리가 끊겼다. 해성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재화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부터 다리까지 천천히 훑었다. 오늘은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하, 꼰대가 이제 별짓을 다 하네.”

“회장님께서…….”

해성은 잠시 말을 멈췄다. 본인에게 ‘너 게이야?’라고 묻기가 어려웠다. 그냥 재화처럼 별것 아닌 것처럼 물으면 될 텐데.

“꼰대가 뭐?”

“그런 거 있잖아. 남자애들끼리 하는 그런 거에 빠진 건 아니냐고.”

그 말에 재화가 기가 찬 듯 어이없는 웃음을 낮게 터트렸다. 물론 해성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편견일지도 모른다. 동성애자라도 어차피 이성애자들과 같은 인간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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