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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장준의 말이 맞다. 재화는 워낙 대하기가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게 사춘기 같은 것도 아닌 원래 타고난 자체가 예민한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심경을 거슬리지 않으려 해성은 일부러 말을 더 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너 잘하는 건 잘 알고 있으니 그런 건 걱정 말고.”
그때 장준이 지갑에서 보라색의 카드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해성은 잠시 카드를 보았다. 이제껏 해성은 그냥 보통 학생처럼 공부를 하는 것 외에 집에서 하는 건 딱 하나였다. 바로 재화의 방을 청소하는 것. 그 정도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사실상 하는 일이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보통 대학생들도 부러워할 만큼의 용돈을 받았다.
학교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재화와 다녔으니 차비를 쓸 일도 없었고, 딱히 군것질을 하는 것도 아니라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 게 다였다. 한 번씩 친구들과 매점을 가긴 했지만 그것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용돈의 90%는 거의 저금을 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은행에 들를 시간도 없어 거의 현금을 책상 서랍에 모아놓았었다.
개교기념일이 평일이라면 그때 그 현금을 모조리 가져가 은행 통장에 넣었다. 학생이 너무 많은 돈을 가져가 저금을 하면 괜한 의심을 받을까 봐 ATM기계를 거의 이용하곤 했다. 제일 큰돈을 썼던 건 작년 재화의 생일이었다.
재화의 친구들은 꽤 짓궂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은혜를 입고도 갚지 않냐며 이번 생일은 기대해 본다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재화는 그런 자신의 친구들을 보면서 말리지도 그렇다고 동조하지도 않았다.
무엇을 사주어야 할지 꽤 많은 고민을 했다. 재화는 넘칠 만큼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웬만한 브랜드는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도 금화 토건에 들어와 살게 되어 많은 명품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고, 보통의 부자들은 살 수도 없는 가격대의 디자이너 물건이 따로 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었다.
어차피 무엇을 사주든 재화의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아에게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게 뭐야?’라고 물었을 때 명품 지갑이나 운동화라고 했다. 현아는 ‘설마 진짜로 위재화 주려고?’라고 물었고 해성은 그저 웃었다. 물론 두 가지를 모두 사도 되겠지만 어차피 재화에겐 필요 없는 물건일 거라 생각했다.
백화점에 가서 고민을 했을 때 직원은 고등학생들이 제일 갖고 싶어 하는 디자인의 지갑이라며 해성에게 자신 있게 추천했다. 해성은 그 지갑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선물 하나만 또 준다며 재화의 친구들의 입이 시끄러울 것 같아 호텔 베이커리의 생일 케이크도 같이 준비를 했다.
선물과 케이크를 전해 준 건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였는데 그날따라 집에 아무도 없었다. 야자를 마치고, 씻고 준비하고 나오니 재화는 잔뜩 피곤한 얼굴로 현관을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왠지 모두의 앞에선 선물을 주는 게 어색하기도 했고 거기서 재화가 받지도 않고 거절을 하면 더 민망할 것 같아 집에서 주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12시를 넘기기 20분 전 재화가 들어와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말을 걸기도 전에 재화가 올라가 버렸고 해성은 한참을 재화의 방 앞에 서서 서성거렸다. 다행히 12시 5분 전 재화가 씻었는지 젖은 머리카락을 헝클며 문을 열었고 바로 문 앞에 서 있는 해성을 보고 살짝 놀란 듯했다.
12시가 넘어가기 전 케이크와 선물을 전달할 수 있었지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은 결국 12시를 넘기고 말았다. 재화는 말없이 선물을 받았고, 케이크도 마주 앉아 그 새벽에 다 먹어야 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 무엇인가를 먹는 것도 오랜만인데다 생크림이 가득한 케이크를 먹는 건 꽤 버거웠지만 재화는 그 마른 몸에도 쉽게 케이크를 해치웠다. 그리고 그 선물은 재화가 쓰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카드 한도는 걱정 말고 써. 아마 강남에 집 한 채 정도는 긁을 수 있을 테니.”
“아닙니다.”
“너만 위해 쓰라는 말이 아니라 재화 위해서 치장하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재화의 심부름꾼이지만 급이 떨어지지 않게 알아서 꾸미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물론 여기엔 그녀의 처녀성을 바쳐야 하는 그 대가도 포함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늦지 않게 출발해.”
장준은 옆의 테이블에서 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조심히 봉투를 받아 든 해성은 그 안을 살폈다. 안쪽의 종이에 적힌 건 처음 보는 곳의 주소였고, 카드가 들어있었는데 그건 이 아파트의 키인 모양이었다. 해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참.”
“네.”
“재화 녀석이 똑똑하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피임은 철저히 하고. 장 박사 번호는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그럼 나가봐.”
장 박사는 금화 토건의 주치의였다. 24시간 늘 대기조처럼 금화 토건을 위해 움직이는. 말 그대로 사후피임약이 급하면 바로 장 박사에게 연락하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다시 한번 숙인 해성은 뒤로 돌아 서재를 빠져나왔다.
복도 끝엔 완섭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한번 뱀 같은 시선으로 쭉 훑어보았다.
“네년 구멍은 내가 먼저 뚫어주려고 했는데.”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사정 같은 거 보지 않고 그냥 할걸. 쯧.”
그 사정이라는 게 아마도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라는 말이라는 게 틀림없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길 여사는 여자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늘 행동거지를 조심히 하라고. 그래서 여름에도 교복을 제외하고는 반팔이나 반바지를 입은 적이 없었다.
이럴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을수록 좋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올라 차라리 화를 낼까 아주 잠시 고민했다.
퍽.
“윽!”
무엇인가가 강하게 날라왔고 그게 완섭의 이마에 맞고 떨어졌다. 순간 이마를 잡으며 허리를 잡은 완섭의 손가락 사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놀란 해성이 뒤를 돌아보자 태화가 당장이라도 다시 던질 듯 작은 도자기 하나를 쥐고 있었다.
해성이 저도 모르게 낮은 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방금 완섭의 이마에 맞고 떨어진 반쪽이 난 도자기 역시 태화가 잡고 있는 도자기의 작가가 같았다. 수천만 원대의 가격을 호가했고, 그 작가가 죽자 다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태…….”
해성이 태화를 부르기도 전에 빠르게 복도를 걸어와 아직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있는 완섭의 정강이를 그대로 걷어찼다. 딱딱한 블로퍼로 인정사정없이 찍어 누르듯 쳐서 그런지 완섭은 정강이를 두 손으로 잡고 쓰러졌다.
“이 새끼야. 우리가 삼촌, 삼촌 하면서 따르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 뒤로 개짓하는 거 모르는 줄 아나 봐? 눈 감아 주는 건 모르고.”
“죄, 죄송합니다.”
아픔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린 듯 완섭이 벌떡 일어나 태화에게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태화의 말이 맞다. 어쨌거나 완섭은 장준의 오른손이었고 어려서부터 봐와 삼촌이라 부르긴 했다.
금화 토건의 위장준이 조직폭력배의 보스였다는 사실은 유명했고, 완섭 역시 당시 부장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고 했다. 그리고 태화는 유난히 그런 냄새가 나는 조폭 땟물 좀 빼라며 밖에선 아는 척을 하지 말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