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다녀왔습니다.”
“따라와.”
“네.”
바로 재화의 뒤를 따라 본부장실로 들어섰다.
“안 비서, 퇴근해.”
“네, 상무님.”
해성도 눈으로 살짝 주영을 향해 인사를 했다. 주영은 40대 중반의 실력이 좋은 비서였는데 늦게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2개월 만에 복귀해 회사 내 여직원들 사이에서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입사 이래로 일 처리도 완벽하고 사소한 실수 하나 없어 재화나 장준이 무척이나 신뢰하는 직원이었다.
해성 역시 가끔씩 주영과 대화를 나눌 때면 꼭 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편하게 대하는 몇 안 되는 직장 동료 중 하나였다. 주영 역시 해성을 동생처럼 무척이나 아껴주었다.
본부장실로 들어서자마자 서류를 꺼내 들어 바로 재화의 앞으로 건넸다. 이미 소파에 앉아 있던 재화는 넥타이를 슬쩍 끌어 내리며 바로 서류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앉아.”
시선은 계속 서류를 훑고 있으면서 해성이 서 있는 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해성은 가방을 옆으로 놓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재화 역시 일을 무척이나 꼼꼼히 하고 실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해서 서류를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해성은 어쩐지 속이 쓰라린 느낌이었다. 어젠 건강검진으로 하루 종일 굶고 오늘은 먹은 거라곤 아침에 길 여사가 주었던 샌드위치뿐이었다. 지금은 배가 고픈 건지 속이 쓰린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벗어.”
여전히 서류를 넘기며 단 한 순간도 시선을 주지 않고 재화가 말했다. 재화는 거의 마지막 장을 훑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해성은 재킷을 벗어 옆으로 두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워낙 기초 체온이 높은 터라 재화는 웬만해선 사무실에 히터를 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빌딩에 히터가 돌아가고 있으니 아예 차가운 공기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다른 곳과 다르게 서늘함이 느껴졌다.
두 팔을 교차해 민소매까지 벗어 옆으로 두고 팔을 막 등 뒤로 가져가 브래지어 훅을 풀려고 할 때였다. 탁, 소리와 함께 재화가 서류를 덮고 해성을 보았다.
“한 바퀴 돌아.”
브래지어를 벗는 것을 멈춘 해성이 재화가 확인할 수 있게 그 자리에서 한 번 돌았다. 완전히 돌아섰을 무렵 어느샌가 일어난 재화가 그녀의 바로 앞에 있었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그녀의 바지 안으로 바로 손을 넣었다.
뜨거운 손이 단번에 속옷 안으로 파고들어 가 거웃을 스치고 틈새를 타고 내려갔다. 슬쩍 손가락이 스치는 곳에 해성이 반응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입술 안쪽 살을 질끈 깨물었다. 순식간에 내려간 손가락이 들어가지는 않고 그 경계선에서 마치 가늠을 하듯 가볍게 빙글 돌렸다. 그리고 재화는 바로 그녀의 바지에서 손을 빼내고 티슈를 꺼내 자신의 손을 닦았다.
“다리 벌린 건 아닌가 보네.”
“네.”
“입 벌려.”
해성이 그저 재화를 바라보자 손이 올라왔다. 길고 두꺼운 재화의 손가락의 바로 해성의 입으로 들어와 혀를 헤집었다.
“입을 벌릴 수도 있잖아.”
손가락 특유의 짠맛이 느껴졌지만 해성은 인상을 찌푸리지도, 그렇다고 혀를 움직이지도 않았다. 재화의 손가락이 마치 혀를 쓸 듯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절대 내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다른 인간에게 벌릴 생각 하지 마.”
참 모순적이다. 무슨 짓이든 하라는 듯이 굴어놓고 이렇게까지 확인을 하는 인간이라니.
해성에게 첫 경험은 어떻게 보면 재화가 맞긴 했다. 그건 해성의 입장에선 거의 섹스와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장준에 의한 것이었는데 무엇보다 피가 들끓기 시작하는 10대 시절에도 재화는 크게 여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때 한창 재계 쪽에서 남색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준은 절대 재화에게 그런 취향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별채로 그 어느 여자를 보내도 재화는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으로 지목된 건 해성이었다. 장준은 해성에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세우게 만들어 여자의 맛을 알려주라고 했다.
그날은 눈이 무척이나 많이 오던 날의 일이었다.
#02.
수능이 끝나면 말 그대로 자유가 주어진다. 재화와 해성은 장준의 명령에 따라 바로 운전면허를 땄고 면허증이 나옴과 동시에 차 키가 주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사용되지 않던 별채가 꽤 바쁘게 돌아갔다.
밤이면 연예인이라도 보는 듯 화려한 생김새의 여자들이 수차례 드나들었다. 물론 그 별채에 있는 사람은 바로 재화였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많은 말들이 많았다. 어차피 재화의 성격이 좋지 않다는 건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었지만 본인은 섹스를 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 걸 지켜본다더라, 여자가 만져도 반응이 없다더라 하는 소문 같은 것들이 은연중 떠돌았다.
“해성아, 서재로 가봐. 회장님이 부르셔.”
“네.”
대학 발표는 2월이고 이미 수능 성적표도 나왔다. 수능을 보던 날 감기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만점에 내신 역시 걱정할 건 없었다. 학교에서도 이미 축배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고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국대를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혹 장준이 재화의 성적에 맞춰 대학을 바꾸라고 하면 그렇게도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해성은 장준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노예였다.
해성은 복도 맨 안쪽에 있는 장준의 서재 앞에 멈춰 섰다. 옷차림새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노크를 했다.
“들어와.”
장준의 목소리가 아닌 장준의 비서 목소리였다. 안으로 들어간 해성은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고 돌아서서 장준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고개를 든 해성은 장준의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앞으로 가서 섰다. 장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벌써 이 집에 들어온 게 10년이 가까워진다. 그동안 장준의 주름이 늘었고, 흰 머리가 눈에 띄게 많아졌지만 날카로운 눈매는 그대로였다.
그 날카로운 눈이 해성의 머리에서 다리 끝까지 훑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비서 역시 날카로운 눈매로 해성을 보고 있었다.
“코트 벗고 내가 보이는 쪽으로 서봐.”
“네.”
해성은 코트와 재킷을 벗고 책상 옆쪽으로 가서 섰다. 흰 셔츠는 몸매가 드러날 정도로 거의 딱 맞았다. 그리고 바지는 다리 라인을 온전히 다 드러내는 슬랙스였다. 장준의 눈이 다시 한번 해성의 몸을 살폈다. 물론 그게 성적인 눈빛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해성은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