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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계 인사들의 2세나 3세들이 마약, 환각 파티를 벌이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게 재화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한민혁 즉, 이 나라에서 세 번째 손가락에 꼽히는 재원전자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호텔 내의 클럽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도. 게다가 민혁의 외할아버지가 전 여당의 총재로 권력까지 있었다.
아마 해성이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이런 것들은 단 하나도 몰라도 되었을 것이다. 아니,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이런 불법적인 것들을 자꾸 접하다 보면 윤리적, 도덕적 생각이 해이해진다. 생각이 없으면 말려드는 것이고 그나마 생각이 있으면 재미만 보는 거다. 그리고 좀 더 똑똑한 사람은 그걸 이용하는 거고.
“제가 그 정도로 간이 크진 못해서요. 조금 더 알아봤을 뿐입니다.”
[그 정도로 민현석이 수그리고 나왔다? 그런 개새끼라도 자식은 귀한가 봐?]
“그런 모양입니다.”
[어디야?]
“들어가는 중입니다. 5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회장님과 저녁 약속 있어, 늦지 않게 와.]
“알겠습니다.”
갑작스레 잡힌 저녁 약속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금요일 밤의 스케줄이 없어 오늘은 푹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그른 모양이었다. 전화가 끊기자 해성이 낮게 숨을 뱉었다.
세상에 신은 없다. 신이 있었다면 그녀가 버려지지도, 위장준 회장이 아픈 곳 없이 저렇게 건강하지도 않을 것이다. 때론 이만큼이나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줬는데 이만하면 다 갚은 거 아닙니까,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오려고 할 때가 있었다. 아마 현아 같은 성격이었다면 이미 그렇게 말을 뱉고 그 끝이 어떻든 끝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해성에겐 그런 용기 같은 건 일절 남아있지 않았다.
거대한 회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매끄럽게 주차를 한 뒤 차에서 내렸다. 가방을 챙기려 허리를 숙이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한 번 툭, 두드렸다. 놀라 눈을 크게 뜬 채로 돌아보자 민혁이 웃고 있었다.
“해성아, 우리 오랜만이네. 얼마 만이지?”
“그러게. 오랜만이야.”
말 그대로 그들이 어울리는 모임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한 달에 한, 두 번 만난다고 했었는데 어쩌다 한 번씩 해성이 참석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땐 재화의 기분이 무척이나 저조한 날이었는데 다른 여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방패 막 같은 것이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의 재화는 여자들의 작은 스킨십 하나도 불쾌해했다.
사실은 예상외였다. 민혁이 이렇게까지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지만 1학년 때도 다른 반이었고 2학년부터는 아예 이과와 문과가 나뉘며 만날 일이 더더군다나 없었다. 같은 대학을 진학했다지만 인문대와 공대는 아예 반대 방향에 있었으니 우연이라도 만날 일이 없었다. 그저 그 모임에서 어쩌다 한 번씩 만났는데 민혁은 그럴 때마다 늘 반가워했다.
민혁을 보면 가정의 분위기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재원 전자라고 하면 회장 부부가 워낙에 잉꼬부부인데다 가정이 화목해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본보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민혁이 호텔 내 클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눈을 감는다는 게 뭐랄까, 한땐 꽤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뭐야, 전혀 반가워하는 얼굴이 아닌데?”
“오늘 좀 일이 많았어. 피곤한가 봐.”
“안 그래도 방금 재화 만나고 오는 길인데. 엄청 큰 건 완벽하게 따냈다며?”
정말 재화가 그런 식으로 솔직하게 칭찬을 했을까? 그냥 가볍게 말한 것을 민혁의 성격상 추켜세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냥 할 일 한 건데 뭐.”
“맞다, 잠깐만.”
바로 옆이 민혁의 차인 모양이었다. 의외로 민혁의 차는 잘나가는 재벌 3세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소박한 차라고 생각됐다. 말 그대로 흔히 볼 수 있는 5시리즈 차량이었는데 차가 깔끔해서 그렇지 연식이 꽤 된 것 같기도 했다.
민혁이 해성의 앞으로 봉투 하나를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 들면서 해성은 민혁을 보았다. 민혁은 옅은 쌍꺼풀에 큰 눈이 인상적인 미남이었다. 성격도 좋아서 현아도 고등학교 시절 민혁이 정도라면 친구로 두어도 괜찮은 재벌일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우리 호텔 파인다이닝 제대로 리모델링 했거든. 언제든 와서 먹어. 남자친구 데려오면 내가 서비스로 좋은 와인 한 병 선물할게.”
알고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아니다. 민혁이라면 그냥 순수하게 말한 것일 것이다. 다른 친구들에게 대하듯 자연스럽게.
이 집안에 들어온 이상 해성에게 자유란 없었다. 남자친구는 고사하고 위장준 회장이 죽어 이곳을 벗어나기 전까지 해성은 말 그대로 금화 토건의 노예일 뿐이었다. 짖으라고 하면 짖고, 다리를 벌리라 하면 벌려야 하는.
“고마워.”
어차피 받아두고 가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괜한 말을 섞을 필요는 없었다.
“재화한테는 비밀이다. 정말 특별히 주는 거야.”
“그래.”
재화라면 어차피 프라이빗한 곳을 선호하지 그렇게 드러내야 하는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걸 재화에게 줘봤자 쓰레기만 될 것이다.
“아, 빨리 올라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올라가 볼게. 운전 조심해.”
“그래, 나중에 또 보자.”
해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민혁을 보았다. 민혁 역시 차에 타지 않고 해성을 보고 있었다.
“안 올라가?”
“너 가는 거 보고 갈게.”
“뭔가 비서님 대하는 느낌이네. 안 그래도 되니까 그냥 올라가.”
“그래, 그럼.”
스무 살이 되던 때부터 거의 재화의 비서나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런 습관이 몸에 밴 듯했다. 그렇게 말하고 바로 돌아서자 뒤에서 웃음이 터졌다.
“너무 쿨해서.”
“봐달라는 거야, 올라가라는 거야?”
“올라가. 나중에 봐.”
그렇게 웃으며 민혁이 자신의 차 운전석 쪽으로 걸어갔다. 해성은 싱거운 녀석이라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돌아서서 앞을 보는데 아직 차에 타지 않은 민혁이 해성을 보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민혁의 웃음을 보자 왜 학교를 다닐 때 그렇게 인기가 많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웃으면 큰 눈이 가늘어지며 눈웃음이 눈에 띄었다. 잘생긴 배우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피부가 워낙 좋아 어떻게 보면 밝은 아이돌 같기도 했다. 별 반응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민혁은 꼭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손을 흔들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해성은 고개를 들어 올려 층수가 올라가는 계기판을 보았다. 7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바로 앞으로 지나가는 재화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