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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올라탄 해성은 시계를 보았다. 빠르게 일 처리를 한다고 해도 벌써 6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물론 재화는 3일간의 여유를 주었으니 내일 서류를 작성해 올려도 되겠지만 일을 미루는 건 또 그녀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 바로 회사로 향하는데 음악이 끊기며 벨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 HUD를 보니 현아의 이름이 떠 있었다.
“어, 현아야.”
[어디야?]
“회사 들어가는 길.”
[넌 사무직인 애가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좀 그럴 일이 있었어. 참, 남자친구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덕분에 협상이 잘 끝났어.”
[맨입으로?]
“밥 한 끼 산다고 해.”
현아는 중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로 그녀가 금화 토건에 어떻게 잡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늘 해성의 일을 걱정해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해성이 재화와 어떻게 엮이게 된 것인지 자세히 알게 된 건 대학에 간 뒤의 일이었다. 그전에도 늘 궁금했지만 현아는 해성을 위해 전혀 묻지 않았다.
그런 현아의 진심을 알게 된 뒤로 해성도 완전히 현아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전부터도 현아가 다신 만나지도 못할 만큼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금화와 엮인 자신의 처지가 늘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그 변태가 잘 넘어왔나 봐?]
“돈만 많은 무식하고 순진한 인간인지라.”
아마 세상의 이치에 조금 더 밝은 인물이었더라면 현석은 그렇게까지 쉽게 넘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번 일은 운이 꽤 좋았다고 봐야 했다.
[너 인센티브는 잘 받는 거지?]
“그럼. 좋은 곳 예약해. 이번엔 진짜 내가 제대로 살게.”
장준은 전혀 돈에 인색하지 않았다. 물론 월급도 많은 편이지만 이렇게 큰 건을 성공시켰을 때 따라오는 보수도 많았다. 이미 장준의 머리에서 해성 부모님의 빚은 다 사라진 모양이었다. 하긴, 이 용인 부지만 해도 이미 그 빚은 몇 번을 갚고도 남았다. 그리고 재화 역시 다행히 돈에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취향이나, 수준에 맞추라며 직접 카드까지 쥐여주었다. 재화가 던지듯 주었던 시계도 V사로 그녀가 타고 다니는 B사의 차 가격과 비슷했다. 옷이나 신발 역시 거의 D브랜드를 이용했는데 그건 오로지 재화의 취향이었다.
그러니 그전까지 아무리 또래들보다 많은 월급을 받고, 인센티브를 받는다 하더라도 명품은 고사하고 브랜드를 기피했던 해성이 1년 전부터 그 누구보다 빠르게 신상품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재화가 인색하진 않어, 그치?]
“그러게.”
[근데 너 진짜 이미 부모님 빚은 몇 번이나 갚고도 남은 거 아니야? 회사도 세웠겠다, 야.]
“생명의 은인이잖아. 종신계약이야.”
그때 장준이 아니었다면 해성의 앞날이야 뻔했다. 학교는 가지도 못한 채 마담 밑으로 들어가 심부름이나 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미성년자라는 것을 속이고 몸을 팔아야 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이렇게 착실한 직장인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미 해성의 말을 잘 알아들은 현아는 낮은 한숨만 쉴 뿐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현아는 늘 재화의 집안을 보고 배워먹지 못한 깡패 집안이라고 했었는데 그때마다 속이 시원하긴 했다. 물론 그 말을 듣는 재화는 전혀 타격이 없어 보였지만.
[맞다. 재화, 강수진하고 만난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너 자꾸 잊는 모양인데 나 꽤 유능한 기획사 실장이거든?]
현아의 삼촌이 배우 3대 기획사 중 하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연예계에 관심이 많던 현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사를 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연예계에 대한 소문만은 빠르게 접했다.
“스캔들은 곤란해.”
[오죽하겠어요. 위장준 회장님께서 눈을 벌겋게 뜨고 계시는데. 아주 그냥 정치 거물 딸 잡는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
“그래?”
[그런데 맘에 차는 애가 없나 봐. 당연하지, 거물급 딸이면 거의 시집갔든가 우리한텐 이모뻘인데. 그게 어디 쉽나.]
그때였다. 업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퇴근하고 전화할게. 성질 급하신 분 전화야.”
[하여간 위재화는 타이밍도 더럽게 못 맞춰. 이따 전화해.]
현아가 서둘러 전화를 끊자 다시 끊겼던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소거를 하고 해성은 재화의 전화를 받았다.
“네, 송해성입니다.”
[어떻게 된 거야?]
“이야기 잘 끝났습니다.”
[계약금.]
“기존 가격의 97%로 추진했습니다.”
재화는 말이 없었다. 아마 재화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150%를 제안해도 아마 현석이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재화로선 그 땅을 굳이 먹지 않아도 얼마든 넘어갔을 것이다. 물론 해성에게 회사에선 개망신을 주고.
[진짜 다리라도 벌리기로 한 모양이지?]
이럴 땐 그냥 입을 다무는 게 나았다. 이젠 이런 대우에 이골이 날 만한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얼굴로 열이 몰리는 느낌에 창문을 모두 열었다. 어차피 금요일 오후의 도로는 밀리고 있어 그저 겨울이 막 몰려오는 그 특유의 시큰함만 느껴지고 있었다. 창을 열자 그 서늘함이 몰려와 몸을 적시는 것만 같았다.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아마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까지 재화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약점을 좀 쥐고 흔들었습니다.”
[약점?]
“아들이 외국에 있는데 마약에 절어있는 모양이에요.”
[선물한 건 아니지?]
금화 토건은 말 그대로 위장준 회장 즉, 깡패 토대로 세워진 회사다. 말이 좋아 깡패지 그저 양아치들 아니었던가. 이런저런 지저분한 일도 모두 하는. 장준은 불법적인 일은 모두 해보았다. 사람 하나 이 세상에서 흔적을 지워버리는 건 우스운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사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정도는 해성도 성인이 되고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