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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히게 해줘-4화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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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을 포기한다면 3천 가구는 아니더라도 2천 800가구 정도는 플랜을 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재화가 용인을 하느냐가 문제였다. 아마 재화는 동탄 구역으로 들어가는 곳은 아파트 속의 복합건물을 구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안 되겠으면 기존 매매가의 1.5배 불러. 그거 들어먹지 않으면 협상 없던 걸로 해.”

“알겠습니다.”

“송 과장.”

“네.”

“GF에서 현재 제일 공들이고 있는 곳인 걸 명심하고.”

재화가 해성의 얼굴에서부터 다리 끝까지를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부도 위기를 맞고 있던 경남 지역 아파트 회사를 흡수하며 GF 엔지니어링이 출범했으나 아직 단독 수도권 공사를 따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은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자리이기도 했고 세간의 관심도 쏠려있었다. 그만큼 그 10%의 부지를 확보할 수 있는 게 중요했다.

“다녀와.”

고개를 숙인 해성이 본부장실에서 빠져나왔다. 오늘 하루도 피곤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

접견표를 발부받고 대기를 하고 있었다. 접견 예약이야 해놓아서 다행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오늘은 확답을 받아야 했다. 물론 성범죄를 저지르고 들어가 있는 인물을 만나야 하는 건 여전히 불쾌했지만.

접견실 입장 전 핸드폰이 든 가방을 맡겨두고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일어서서 곧 안으로 들어올 민현석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현석은 특유의 그 거들먹거림을 몸에서 지우지 못한 채 실실 웃고 있었다.

“우리 미인 아가씨 또 왔네.”

“안녕하십니까.”

“또 딱딱하게 군다.”

시간은 겨우 15분이었다. 이 시간 안에 결판을 내야 했다.

“그러니까 개인 명함 한 장만 주면 우리 대화가 좀 수월할 수도 있다고 해도 그러네.”

말 그대로 성 접대를 하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해성은 이럴 때야말로 정말 남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세상을 살기 편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뻔히 재화는 민현석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늘 해성을 혼자 보냈다. 말 그대로 알아서 일을 잘 따내오라는 뜻이었다.

“110%. 그 이상은 저희도 못 드립니다. 오늘이 마지막 제안입니다.”

이미 높은 가격을 불렀다. 거기서 무려 10%나 더 높여 올린 것이다. 이 가격에 그 땅을 살 사람은 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뱀 같은 현석은 이미 주변 사람들을 매수해서 그 땅을 얼마나 금화 토건에서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이미 도박과 여러 합의금으로 인해 파산 직전인 현석에게 110%는 유혹적인 숫자일 것이다.

문제는 그 합의금이 아주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 재화는 모르고 해성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해성도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정도 비밀 정도는 혼자 알고 있어야 했다. 말 그대로 오늘 재화의 “GF에서 현재 제일 공들이고 있는 곳인 걸 명심하고.” 이 말의 뜻과 위아래로 훑어본 건 안 되면 현석의 뜻대로 다리를 벌리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재화가 일주일만 더 시간을 주었으면 최악의 협박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없었다.

“당장 합의금 급하실 텐데요.”

“뭐?”

“좀 더 감옥에서 썩으셔도 뭐. 그쪽이 제 지인이거든요.”

무려 부장 판사의 여동생까지 건드렸다. 그쪽에서도 쉬쉬하고 있고 갖은 압박을 하며 현석의 목을 죄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법관의 힘이라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있지도 않은 죄까지 뒤집어씌워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들 가능성까지 있었다. 법치국가? 그게 통하지 않는 집단도 있었다.

순간 현석의 얼굴이 굳었다. 이럴 땐 한국대를 나온 것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감사하게 된다. 여러 인맥을 넓힐 수 있었던 것도 그 대학의 꼬리표였다. 아주 운이 좋게도 부장 판사의 조카가 바로 해성이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의 남자친구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파다 보면 간혹가다 이렇게 좋은 운이 걸리기도 한다.

물론 130%까지는 줄 용의도 있었다. 어차피 금화 토건의 돈이지 그녀의 돈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후까지 보류해 둔 것이었는데 그냥 이 지저분한 곳에서 빨리 나가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허, 요즘 같은 세상에…….”

“먹히지 않을 수도 있죠. 그리고 좀 더 파헤칠 부분도 남아 있으신데. 참, 107%.”

“이봐, 송 과장!”

아직 현석의 얼굴이 불확실했다.

“97%.”

갑자기 10% 그것도 기존의 가격에서 더 내려가자 현석의 낯빛이 붉어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우리 집사람하고 만나.”

“전 협박은 안 했습니다.”

“어떻게 알았어?”

현석이 이를 갈며 말했다.

“제가 민현석 사장님보다 발이 더 넓다고 해두죠. 그럼 97%로 진행하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게 고집 조금만 덜 부리셨으면 110% 가지셨을 텐데 안타깝네요.”

열을 받아서인지 현석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었다.

“바로 연락하십시오. 전 지금 바로 자택으로 가겠습니다. 참, 말 바꾸시면 아시죠? 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사모님 통해 이야기 전달하겠습니다.”

이미 서류를 모두 정리해 온 뒤였다. 바로 현석의 자택으로 가서 도장만 찍게 하면 이번 일은 끝이었다. 현석의 아들도 현재 미국에 가서 약을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눈치가 빠른 현석은 이미 그것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90%까지 한 번에 확 깎을 걸 그랬다. 하지만 사람을 너무 궁지로 모는 것도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많은 경험으로 터득해서 늘 해성은 아슬아슬한 선을 지켰다.

물론 그동안 제시했던 가격의 97%라고 해도 기존 땅값의 7% 이상은 받는 것이니 현석의 부인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바로 도장을 찍고 서류상의 작업이 끝났다. 내일부로 직원을 보내 일을 마무리할 것이라고 하자 현석의 부인은 남편의 똥고집에 집까지 다 날리는 줄 알았다며 울음까지 터트렸다.

이럴 땐 해성도 늘 입 안이 썼다. 순박함에 가까울 정도인 부인은 현석이 감옥을 가기 전까지도 남편을 믿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논밭을 가지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신도시 열풍으로 돈을 가지게 되면서 그에 맞는 부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마 옛날 같았으면 남편 몰래 비자금이라도 만들어 두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해성은 그런 것도 관두었다. 남의 인생에 개입해봤자 말 그대로 남이라 나중엔 욕받이가 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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