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롭히게 해줘-3화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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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괜히 화만 내실 거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그리고 어차피 침실만 청소하는 건데요. 그럼 출근하겠습니다.”

“이거 먹으면서 가. 어제 건강 검진했잖아, 내가 채소는 다 구워 넣었어.”

길 여사는 빨리 해성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들려주었다. 해성은 웃으며 그것을 손에 쥐고 빠르게 펜트하우스를 벗어났다.

바로 어제 건강검진을 하느라 계속 속이 빈 상태라 그런지 토악질이라도 나올 것처럼 위가 쥐어짜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오늘 스케줄을 확인하면서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물었다.

샌드위치엔 사과가 생명이라며 길 여사는 옛날부터 늘 맛있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위가 오늘은 비어있어 익힌 채소를 넣느라 사과를 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변함없는 맛이 당장 팔아도 될 정도로 맛있었다. 어차피 본사 건물은 겨우 길을 건너 세 블록이 떨어진 곳이라 넉넉히 걸으면 10분 내로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길에 핸드폰으로 미리 주문해 둔 커피를 받아 챙기고 조금 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빵.

큰 클랙슨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길가에 서 있는 빨간 스포츠카의 창문이 열리며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어?”

입 안에 가득 넣고 오물거리던 샌드위치를 서둘러 삼킨 해성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상대는 바로 아마도 바로 어젯밤 재화의 상대였을 배우 강수진이었다. 18살에 데뷔해 벌써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 최고 미녀 타이틀을 놓치지 않고 있는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딱히 재화가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하든 상관은 없었지만 위장준 회장이 해성을 재화에게 붙인 이유는 딱 하나였다. 금화 토건의 제일 중요한 시기에 쓸데없는 스캔들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해성은 성인이 되던 때부터 거의 재화의 뒤처리를 하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해성의 일 처리 능력을 보고 위장준 회장은 늘 안타까워했다. 남자였더라면 정말 믿고 재화의 그림자로 또한 금화 토건의 이인자로 키웠을 거라고. 그 점에 대해선 해성도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이인자가 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허나, 해성은 자신의 입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 말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 말은 그저 삼키고 그 삼켜버린 욕심이 불덩이가 되어 몸을 태워버린다 하더라도 발설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딱히 재화와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지만 나쁜 것도 아니다. 아니, 해성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재화는 딱히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종신계약과도 같은 관계가 끝나는 건 아마도 위장준 회장이 세상을 떠나야만 종료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송 비서님이라고 했나요?”

“금화 토건 송해성 과장입니다.”

분명 한 달 전 수진에게 명함을 주었었다. 어차피 또 줘봤자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을 알고 있지만 해성은 그런 속마음은 얼굴에 드러내지 않은 채 다시 한번 명함을 건넸다. 수진은 잘 다듬은 네일아트를 빛내며 그녀의 손에서 명함을 가져갔다. 곧 해성의 명함은 수진의 아주 작은 가방 속으로 쓰레기처럼 들어가 사라졌다.

어차피 수진이 해성을 모른 척하는 건 대부분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재화가 만나왔던 여자 중 그 어느 누구도 해성을 견제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어쨌거나 비슷한 나이대의 이성이 거의 비서처럼 달라붙어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그런 것이었다. 그게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잘나가는 배우인 수진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키도 크고 늘씬하신데다 예쁘셔서 모델인 줄 알았어요.”

“과찬이십니다.”

“정말인데. 우리 매니저가 명함 안 줬어요? 그동안 그런 제안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해성은 슬쩍 시계를 보았다. 이제 출근 시간까지는 겨우 5분이 남았다. 앞으로 수진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2분 정도 남아있었다.

“제가 지금 출근 시간이라 빨리 가봐야 합니다.”

“어머, 죄송해요. 이것 좀 재화 씨에게 좀 전해줄래요?”

수진이 그 작은 핸드백에서 쪽지를 꺼내 해성에게 건네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

공손히 쪽지를 받아 든 해성은 그것을 서류 가방에 넣고 수진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늘 최소한 출근 시간 10분 정도는 남겨두고 출근하고 싶었지만 재화의 침실이 엉망이 된 날은 이런 식이었다. 일정한 날이면 괜찮겠지만 재화에게 그런 일정함은 없었다.

서둘러 출근을 한 해성은 바로 컴퓨터를 부팅하고 가방에서 수진이 주었던 쪽지를 꺼냈다. 쪽지를 가지고 가야 할 서류 맨 앞에 끼우고 복도로 나와 바로 옆 본부장실로 향했다. 안 비서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노크를 하고 속으로 1, 2, 3을 세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안경을 쓴 채로 모니터를 훑고 있는 재화가 슬쩍 고개를 돌려 해성을 보았다. 이국적으로 보일 정도로 T존이 뚜렷한, 누가 보아도 체격이 좋아 보이는 미남이었다. 잘생긴 이목구비였지만 워낙 깔끔하게 생겨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어쩐지 서늘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대부분 여자들은 재화와 눈이 마주치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눈을 피하곤 했다.

하지만 늘 저 서늘한 이목구비와, 냉정한 얼굴을 마주하는 해성은 별다른 타격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문을 닫았다. 안으로 걸어가 들고 온 서류를 재화의 앞으로 내밀었다. 파일을 펼친 재화가 평소엔 전혀 있지도 않은, 그것도 분홍빛의 쪽지를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해성을 보며 펼쳤다. 쪽지를 훑은 재화의 인상이 더 구겨졌다.

“강수진 씨가 주신 겁니다.”

“어떻게?”

“방금 출근하며 백화점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그 말에 재화가 흠, 소리를 뱉으며 쪽지를 대충 구겨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었다. 수진을 만난 건 한 달 전이었다. 어쩐지 이번엔 좀 오래간다 했다.

“용인 부지는?”

“협상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동탄과 걸쳐있는 곳이라 그쪽과는 조금 더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얼마나?”

“일주일 정도 여유를 주시면…….”

“3일.”

“알겠습니다.”

이번엔 유난히 협상이 쉽지 않았다. 아마 오를 대로 오른 땅값도 문제였지만 그 부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필 감옥에 들어가 있어 쉽지가 않았다.

바로 그곳에 3천 가구 이상의 수용이 가능한 대단지 아파트를 계획 중이라 재화는 물론이고 해성 역시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나마 용인 부지의 70% 정도는 해성의 강력한 제안 아래 5년 전 확보해 둔 곳이었지만 그 문제의 땅은 장준이 승인을 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때 장준이 조금 더 여유를 주었다면 지금처럼 일이 더 복잡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용인, 동탄, 수원은 물론 오산까지의 접근이 무척이나 좋은 땅이었다. 그것을 알고 현재 그 감옥에 들어가 있는 인사도 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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