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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히게 해줘-2화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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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도 들지 않고 있던 재화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막 웃음이 피려던 해성의 얼굴이 굳었다.

“송해성 내 따까리야. 그리고 앞으로 계속 그래야지.”

재화가 해성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쪽 입매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해성은 어렸지만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재화는 앞으로도 그녀가 이 집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평생 자신을 노예로 부려 먹을 것이라는 것을.

앞날을 예고하듯 천둥이 굉음을 내며 지면까지 울릴 정도로 귀를 먹먹하게 했다. 순간 번개가 강하게 번쩍이며 순간 정전이 일어났다. 그 벼락의 순간적인 빛에 재화의 얼굴 반쪽만 드러났다. 입술이 비틀렸다.

#01.

뒤처리를 하는 것은 이 집안에 들어와 이제 17년째 하고 있다 보니 별것 아니었다. 다만 누가 봐도 사용 흔적이 뚜렷한 콘돔이나 체액을 닦았음이 분명할 수건들을 치우는 것만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해성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모든 유학 기회도 마다한 뒤 바로 금화 토건으로 입사했다. 벌써 입사 6년 차로 경영지원본부에서 5년간 일을 하다 현재는 기획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유야 하나였다. 재화가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시화 역시 똑똑했지만 예술로 능력을 발휘하며 현재는 설치미술가로 특히 조명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태화는 거의 학교를 지어주는 수준으로 돈을 퍼부으며 대학을 가 장준의 눈에 들지 못했고 재화는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갑자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같은 과외 선생에게 수업을 받았는데 확실히 재화는 학교 수업에 거의 자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제법 기초가 탄탄해 순식간에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해성에게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워낙 특출난 해성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교내에서는 바로 밑에 이름을 댈 정도는 됐다. 해성은 학교에서 강하게 의대 진학을 압박받았지만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대 건축학부에 수석 입학했다. 경영학까지 복수 전공을 하며 정확히 3년 반 만에 수석 졸업했다. 재화는 연화대에 입학했지만 1학년을 마친 뒤 바로 군대를 갔고 정확히 입대 5개월 만에 동기를 구하다 십자인대파열을 당하고는 바로 의병 제대했다.

바로 복학을 해 졸업을 하자마자 유학을 간 재화는 2년 만에 석사를 따고 돌아와 현재는 기획본부장 자리에 앉아있었다.

“우리 위 본부장이 또 질펀한 파티 벌인 모양이야?”

길 여사는 재화를 젖먹이 시절부터 돌봐왔다고 했다. 해성이 한남동 본가에 살 때 역시 길 여사는 재화의 유모와 다름없었다. 유학에서 돌아와 재화가 독립을 하면서 해성은 물론 길 여사 역시 한남동에서 나오게 됐다.

물론 길 여사는 집에서 출퇴근을 했고 재화는 이 주상복합의 펜트하우스에서, 해성은 이 밑의 35평에서 살고 있었다.

“어휴, 내가 이렇게 키운 건 아닌데 어쩌겠어. 워낙 잘났는데.”

길 여사에게 있어 재화는 본인의 자식들보다도 더 자랑스러운 인물인 모양이었다. 재화 역시 길 여사를 이모라 부르며 편하게 대했다.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줄줄 따르잖아.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내놈들도 몇 있었다면서?”

어디서 그런 소문은 또 들은 것일까. 해성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재화와 같은 곳을 다녔다. 중학교 때까지는 확실히 재화를 동경하거나 존경하는 남자 후배들이 있었지만 정말 재화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고등학교 때는 있었던 걸로 알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어떤 남학생이 재화에게 선물을 주면서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던 것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재화는 뭐랬더라.

“다신 내 눈에 띄지 마.”

바로 조금 전 목격한 듯 그 차갑고 짜증 난다는 목소리가 귀에 콱 박혔다. 확실히 얼굴만 보자면 재화는 특히나 네 남매 중 가장 월등했다. 물론 소연의 딸인 영화도 무척이나 예뻤지만 재화는 그중에서도 특출났다. 대체적으로 장준의 여자들이 모두 외적으로는 우월했던 모양이다. 남매들이 모두 외모가 말 그대로 빛이 났으니까.

“그러게요.”

“하긴, 우리 위 상무가 어디 성별 가릴 얼굴인가. 해성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저번에 우리 딸도 위 상무 보면서 얼굴이 벌게져서 어쩔 줄 몰라 하더라니까.”

길 여사의 딸도 비슷한 또래였다. 그래서 재화도 길 여사의 모유를 먹으며 컸다고 알고 있었다. 아마 길 여사가 그때 유모로 뽑혔던 건 젖동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 노는 놈한테 딸 주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해성 역시 이런 난잡한 생활을 하는 남자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절대 자식은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우리 송 과장은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일을 시킬 작정이야. 송 과장 회사에서 일 엄청 많다며. 저번에 김 기사가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 코피까지 쏟으면서 일한다고.”

“아니에요. 그 정도는 해야죠.”

부모는 빚 30억에 딸을 포기했다. 그 빚은 고스란히 해성이 안았고 그때부터 부모의 빚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11살 때부터 장준은 해성을 키웠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부터 장학금을 받기 시작해 장준이 해성에게 쓴 돈은 많지 않겠지만 30억에 대한 빚은 차근차근 불어나갔을 것이다. 평생을 금화 토건에서 일을 해도 갚긴 힘들 것이다.

한 번씩 농담식으로 장준은 이미 이자는 다 갚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원금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현재 금화 토건은 도로나 교량 사업을 잇고 있었고 슬슬 아파트 건축으로도 눈을 돌리고 있었다.

해성은 GF 엔지니어링 이름으로 자회사 건설회사를 제안했고 장준 역시 재화가 들어와 자신의 밑에서 일을 3년 정도 익히면 바로 맡기겠다고 했다. 이미 GF 엔지니어링은 성공적으로 신도시를 중점으로 고속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GF 엔지니어링으로 해성이 발령이 나지 않은 것도 모두 재화 때문이었다. 그때 그 여름 재화의 그 ‘따까리’ 발언으로 해성은 재화의 밑에서 영원히 일을 해야 할 존재로 박혔기 때문이었다.

장준은 굳이 재화의 집안일까지 해성이 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재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해성을 끌고 오며 여전히 본가에서와 같은 일을 시키고 있었다. 정확히 재화는 해성 아닌 사람이 침실을 치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겪으며 외부에서 보기에 장준은 해성에게 거의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서늘한 눈매와 해성이 17살이 되던 해 들었던 이야기로 장준이나 해성은 절대 그런 사이가 될 수 없다는 걸 서로가 알고 있었다.

“넌 이미 재화 거고 어떻게 해도 상관은 없다만, 멍청한 짓은 용서하지 않는다. 똑똑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겠지.”

알고 있다. 그 멍청한 짓이 재화에게 다리는 벌릴지언정 애를 갖는 그런 불순한 마음을 먹는 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해성 역시 멍청하게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중졸에 깡패 출신의 장준이 괜히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학벌 콤플렉스가 있어서인지 유난히도 똑똑한 시화와 재화를 장준은 무척이나 아꼈다. 그리고 재화는 이미 금호 토건의 후계자로 낙점된 상황이었고 그에 걸맞은 짝을 맞아야 한다고 경고한 것이었다.

물론 그건 장준의 기우였다. 말 그대로 재화는 해성을 자신의 모든 뒤처리를 해줄 능력 있고 돈 들지 않는, 그리고 절대 뒤통수를 때리지 않는 노예라 생각했지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어휴, 그만 치우고 송 과장도 출근해. 벌써 8시 30분이야.”

해성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건 이번 생일에 재화의 비서에게 대신 전달 받은 것이었다. 재화가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비서를 통해 모든 것을 전달받았다. 입는 옷부터 구두 심지어 액세서리까지 말이다.

재화는 치렁치렁한, 그렇다고 짧은 머리카락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해성은 깔끔한 단발도 컷트도 아닌 상태를 늘 유지해야 했다. 마치 그게 위재화의 노예인 송해성이 늘 유지해야 할 모습이었다.

“내가 위 본부장에게 부탁해볼게. 주중이라도 송 과장은 좀 쉬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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