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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
태풍과 함께 몰려온 장마는 끔찍했다. 꿉꿉하고, 불쾌하고, 기분마저 가라앉게 만들었다. 정원의 150년이나 되었다는 둥글게 말린 소나무만은 태풍의 위력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나무 뒤의 별채에서 벌어지는 난잡하거나 잔혹한 일들을 치우는 건 이 집에 고용된 몇몇의 몫이었다.
오늘도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해성은 모두와 똑같은 검정과 흰색의 대비로 이루어진 메이드복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흐읏!”
방음 처리를 완벽히 한 대리석의 고급스러운 건물이었지만 간혹 문이 열려있어 저렇게 비명이나 신음 소리가 흘러나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겨우 11살인 해성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한 번 본 적이 있다.
여자는 TV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여자는 탐스럽고 긴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히자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해성과 눈이 마주치자 그 괴로운 상황에서도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여자의 웃음이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무엇인지 모른다. 왜 웃었던 걸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보기 괴로워 그 뒤로 해성은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절대 고개를 들지 않고 눈을 감았다.
옆에 서 있는 다른 언니들이나 오빠들은 어쩐지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낄낄대며 웃기도 했는데 해성만이 여전히 이유를 알지 못했다.
“도련님 오셨어. 해성이 넌 우산 들고 나가.”
“네.”
도련님이란 해성이 말 그대로 모시고 있는 동갑이자 그녀가 부모님에게 버림을 받은 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엔 같은 반 친구였던 재화였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자존심이라는 건 있었다. 첫날 이름을 불렀다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정작 재화는 별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그녀를 무시할 뿐이었다.
재화가 부럽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계속 학교에서건 이 저택에서건 모르는 척을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커다란 우산은 무게도 상당해서 이렇게 바람까지 강력하게 부는 날 제대로 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다행히 조금 전보다는 바람이 잦아서 다행이었다.
막 거대한 대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열리자 비에 잔뜩 젖은 재화의 모습이 드러났다. 지금은 여름방학이었고 이런 날에도 재화는 축구 교습을 받겠다며 나갔는데 한때 유명 프로 선수가 만든 센터로 실내와 실외가 같이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실내에서 축구를 했겠거니 생각했는데 실외에서 한 모양이었다.
서둘러 우산을 씌우는데 재화는 팔로 툭, 우산을 밀었다. 키는 10cm정도 해성이 컸는데 워낙 마른데다 힘이 없어서 그대로 우산의 무게와 바람의 방향 때문에 넘어지고 말았다. 우산을 놓친 건 채 5초도 되지 않았는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퍼붓는 비 때문에 재화와 마찬가지로 모두 젖고 말았다.
“읏!”
가까스로 일어나 우산을 힘겹게 들고는 다시 재화의 옆으로 섰다. 그리고 얼굴을 손으로 훑어 비를 쓸어내리며 똑똑히 보았다. 그녀가 완전히 자신처럼 젖자 마음에 드는 것임이 분명했다. 위재화는 성격이 정말 꼬였다.
*
말이 좋아 금융사업가이지 사실상 위장준은 조직폭력배이자 고리대금업자였다. 우연히 재건축 붐이 일어날 때 휘청이던 종합건설 회사를 먹게 되면서 그때부터 날개가 돋친 듯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장준에겐 배가 다른 자식 셋이 있었는데 첫째 딸 시화와 둘째 아들인 태화, 그리고 막내아들인 재화였다. 그리고 현재는 무명 배우이자 스폰을 했었던 남소연이 아내로 넷째를 임신 중이었다. 실질적으로 두 사람은 10년 넘게 사실혼 관계였고 세 자식을 모두 소연이 키웠다. 그리고 소연은 무척 착한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는데 세 아이들을 정말 친엄마처럼 살뜰하게 키웠다.
그리고 부모에게 거의 팔리다시피 온 해성도 연민을 느끼는 것인지 정말 잘 대해주었다. 해성은 한 번씩 소연이 자신의 엄마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재화가 부러운 건 바로 소연이 엄마라는 것이었다.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인데 해성은 왜 자신이 이 자리에 앉아 같이 밥을 먹어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다. 게다가 장준은 늘 바빠서 집에서 제대로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이 집에 들어와 6개월 동안 장준을 본 건 오늘이 딱 세 번째였다.
“그래. 시화 너는 9월 입학 준비는 다 끝났고?”
“당장 다음 주 출국이야. 해성이도 같이 보내줘.”
시화는 17살로 무척이나 똑똑했다. 올해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에 합격을 했는데 입학 준비 때문에 2개월 정도 미국에 머물러 있다 들어온 지 보름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세 남매 중 유일하게 해성을 챙겨주기도 했다. 늘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했었는데 시화는 그래서 해성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갑작스럽게 불린 이름에 해성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고개를 들었다. 다섯 사람의 모든 눈동자가 해성에게로 쏠렸다.
“해성이를?”
“남자들만 드글드글한 집에 둬서 뭐 해. 나도 혼자만 가면 외롭잖아. 해성이 머리도 좋은데 가서 같이 공부하면 나중에 회사에 도움도 많이 될걸?”
“흠.”
장준이 고민을 하는 듯 아니면 계산을 하는 듯 입술을 쓸며 해성을 보았다.
해성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워낙 똑똑하다 보니 부모가 교육에 일찍 뛰어들었다. 그리고 작년엔 5, 6학년들을 제치고 수학 경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따로 선행학습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해성은 받아들이는 게 빨랐다.
하지만 그래봤자 고작 어린애였다. 키는 같은 학년인 재화보다 껑충 크다지만 더 어리고, 부모의 빛 대신에 팔려 온. 장준 역시 해성이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나마 거두기로 한 것이지만 벌써 미국으로 보내 괜한 달러까지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해성 하나 미국으로 보낸다는 것쯤은 별것 아니었지만 확실한 길이 정해지는 고등학생 아니, 적어도 중학생 정도도 아니었다.
“내가 좀 아껴 쓸게.”
“말이 되는 소리를.”
장준이 이미 시화를 잘 알고 있다는 듯 픽 웃었다. 확실히 보스가 갖는 위엄도 있었지만 시화에게 장준은 그저 평범한 아빠일 뿐이었다.
“편한 대로 해.”
장준의 허락에 시화가 꺄, 소리를 내며 해성의 손을 잡았다. 해성 역시 시화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