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외전1. 그들이 마음을 갈무리하는 법 (6)
“비켜, 단테 에레즈!”
신경질적인 앳된 외침 앞에서도 단테는 꿋꿋했다.
“그럴 수 없다.”
초조한 이티엘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자근거렸다.
‘이대로는 그웨니르 영애를 놓치고 말아!’
이티엘은 빠르게 눈을 굴렸다. 마침 단테의 다리 밑으로 아이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의 공간이 비어 있었다.
일국의 황제로서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앗, 저기!”
이티엘이 놀라는 척 다른 곳을 가리키자, 단테가 따라서 고개를 움직였다. 그 찰나면 충분했다.
이티엘은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제대로 된 능력을 쓸 수는 없었지만 어린아이의 작은 체구와 민첩함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아…!”
다리 밑으로 슬라이딩하는 이티엘을 발견한 단테는 손을 뻗었지만 한발 늦은 탓에 허공을 잡을 뿐이었다.
성공했다는 충만감도 잠시, 이티엘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흩어지는 빛을 쫓았다.
“유감스럽군요.”
온화한 목소리와 함께 세상이 빙글 돌았다.
쿵!
이티엘은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등이 욱신거렸다.
찌푸렸던 눈을 천천히 깜박인 이티엘은 희미해지는 빛을 등진 채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린든…!”
푸른 하늘을 머금은 듯한 녹빛 눈동자가 시간을 아로새기듯 깜박였다.
“이 이상은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린든의 말을 끝으로 세이딘과 레이프를 감싼 빛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모든 것이 끝났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이티엘은 가슴이 먹먹했다.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쟁취해 온 그로서는 이 상황이 참담할 따름이었다.
“저들에게 상관하지 마십시오, 폐하.”
조곤조곤 진심 어린 조언이 이티엘의 귓가에 닿았다.
“충분히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합니다.”
이어진 린든의 말은 이제 간절하기까지 했다.
화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서러움과 서운함이 북받쳐 올랐다. 앞의 감정이라면 모를까 뒤따른 감정은 원래의 몸이었다면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터였다.
“흐윽….”
하지만 몸과 마음이 어려진 이티엘에게 그 감정들은 자연재해와도 같아서 아무리 노력해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으아아아앙!”
결국 어려진 황제는 밀려온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이 마냥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 * *
“이제 좀 진정되셨습니까?”
린든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손수건을 건넸다.
“됐어!”
이티엘은 카랑카랑하게 외치며 린든의 손을 쳐냈다.
“인제 와서 날 위하는 척하지 말게, 브누아 영식. 이런다 해서 내가 마음을 돌리거나 할 일은 없으니 말이야.”
“네, 잘 알았습니다.”
린든은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공손히 답했다.
아무리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삿대질을 한들 단테에게 안긴 어린 황제는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티엘은 찜찜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축축한 눈가를 씩씩하게 닦아 냈다.
열 살 이후로 이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눈은 퉁퉁 붓고 머리는 누군가 툭툭 치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진정이 되었나 보군.”
지금껏 조용히 있던 단테가 한마디를 꺼냈다. 이티엘은 그제야 그에게 안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화들짝 놀랐다.
이를 알 리가 없는 단테는 황제를 조심스럽게 의자에 내려놓았다. 이티엘은 푹신한 감각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무심코 아쉽다고 생각한 이티엘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아무리 어린아이가 되었다고는 해도 이렇게 철없는 생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거라도 마시십시오.”
이티엘이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는 사이, 린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티엘에게 따끈한 코코아를 건넸다. 무려 새하얀 눈사람이 띄워진 코코아였다.
이티엘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지금 날 애 취급 하는 건가, 브누아 영식? 차를 가져와.”
“마음을 진정시킬 때는 코코아가 좋다고 하신 건 폐하이십니다.”
“…….”
이티엘은 할 말이 없었다.
과한 업무가 있거나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가 몰려올 때면 코코아를 마셨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거기에는 이런 귀여운 마시멜로가 없었지만, 어려진 데다 울고 난 직후다 보니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결국 이티엘은 코코아를 받아 들고 홀짝였다.
진득하면서도 달콤한 코코아는 따뜻하게 배 속에 차올랐고, 그럴수록 이티엘의 마음은 눈사람 마시멜로처럼 사르르 녹았다.
컵에 가득했던 코코아가 절반 정도 사라졌을 때였다.
“……그웨니르 영애는 정말 그자를 좋아하나?”
무안함과 혼란스러움이 뒤섞인 목소리는 바람 앞 촛불처럼 연약했지만 그보다도 훨씬 조용했기에 모두가 알아들었다.
“폐하께서 보시기엔 어땠습니까?”
린든의 물음은 평소보다도 부드럽고 다정했다.
이티엘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대답하지 못했다. 며칠간 자리를 비운 레이프를 원망하면서도 애정 가득한 시선을 보내던 세이딘이 떠오른 연유였다.
기억은 자연스레 레이프가 실종되었던 과거로 옮겨 갔다. 당시 세이딘은 아무런 단서가 없음에도 필사적으로 레이프를 찾아다녔다.
‘왜 레이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자조였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게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많이… 아끼는 것처럼 보이더군.”
마침내 이티엘은 순순히 인정했다. 줄곧 마음을 옭아맸던 족쇄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을 볼 낯이 없어.”
“누구나 하는 실수입니다.”
“그렇다 해도 너무 과했어.”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불리던 때에도 이런 적이 없던 터라 이티엘은 어찌할 줄 몰랐다.
뒤늦은 후회와 부끄러움에 땅을 파고 들어갈 듯한 그를 보며 린든이 결심을 다졌다.
“저도 그랬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그웨니르 영애에게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티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고 상냥하던 린든이었다. 물론 이티엘과 함께 이런저런 일을 벌이기도 했지만 수면 위로 드러내거나 보이는 실수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런 린든이 ‘실수’라고 표현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그웨니르 영애와 부부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티엘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였다. 꽤 충격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정도로 급진적인 생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충분히 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않나. 행동만 하지 않으면….”
“그래서 결혼 준비를 했죠.”
“뭐…?”
이제 이티엘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렇지만 린든은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해 온 양피지 더미를 이티엘에게 건넸다.
“믿지 않으실 거 같아 증거도 가져왔습니다.”
대체 왜 이런 데서 철저한 건지.
이티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양피지를 훑었다. 린든의 말대로 빼곡하게 적힌 글씨들은 결혼할 때 필요한 것들과 얼마가 들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건 뭔가?”
이티엘이 가리킨 것은 ‘관’이었다.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린든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답했다.
“결혼은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미리 관을 준비했다고?”
“네, 최고급 오크로요.”
“…미치겠군.”
이티엘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맞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었죠. 그래서 더욱 그웨니르 영애에게 죄스러웠죠.”
며칠 전, 린든은 세이딘에게 좋아한다는 이유로 했던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사과를 했다. 그 나름의 끝맺음이었다.
‘와, 진짜…….’
배신감으로 가득한 세이딘과 옆에서 낄낄거리며 ‘그러게 내가 뭐랬어. 조심하라고 했지?’라던 레이프가 여전히 눈에 선했다.
그렇게 끔찍해하면서도 세이딘은 린든의 행동을 납득했다. 첫사랑과 경제력과 시스템의 조화가 이뤄 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착각하지 마요. 그렇다고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니니까.’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영애의 눈에 띄지 않게…….’
‘정말 미안한 거 맞아요?’
‘네?’
‘미안하면.’
세이딘은 결혼 준비 목록을 흔들었다.
‘여기에 적힌 것보다 더 좋은 것들로 준비해 주세요.’
‘네…?’
아무 말도 못 하는 린든을 향해 세이딘은 말을 덧붙였다.
‘기회를 드린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어디 한번 마음껏 진심 어린 사과를 해 보세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가만있지 않을 거니 각오하시고요.’
그렇게 말한 세이딘은 ‘뭐, 시스템 때문이라고 해도 나도 못 할 짓을 하긴 했으니까.’라고 중얼거렸지만 린든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설명을 들은 이티엘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한없이 불쾌한 이야기긴 했으나 입을 닫고 있었다면 누구도 이 일을 몰랐을 터였고, 세이딘과도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린든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미움을 사게 되더라도 세이딘에게는 진심이었기에.
생각을 정리한 이티엘은 입을 달싹였다.
“대단하군, 브누아 영식.”
린든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웨니르 영애가 대단하죠.”
“그건 당연한 거고.”
두 남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린든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이티엘은 더 이상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견고해졌다.
“얼른 그웨니르 영애가 돌아왔으면 좋겠군.”
이티엘은 세이딘과 레이프가 사라졌던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세이딘이 돌아오면 곧장 말할 것이다.
왜곡된 생각으로 그녀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무례함과 오만함을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늦었지만 진심으로 결혼 축하한다고.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이티엘은 두렵지 않았다.
그보다도 두려운 것은 세이딘에게 오해를 사는 것이었으니까.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