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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21)화 (121/122)

제121화. 외전1. 그들이 마음을 갈무리하는 법 (5)

이티엘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이자 신하는 계속해서 이티엘을 비난했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세이딘의 마음을 무시하지 말라며 협박했다.

여러 감정이 실망스럽고 불쾌했지만 상관없었다. 황제에 오르기 위해 걸어왔던 길 또한 이러했고, 종래에는 모든 것이 바라던 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니 이 시간도 지나가면 자연스레 그리될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분명 찾아오지 말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서늘한 연녹빛 시선이 이티엘을 찔렀다. 가슴께가 욱신거렸지만 금방 감정을 추슬렀다.

“금방 끝나니 잠시만 양해해 줬으면 해, 그웨니르 영애.”

“퍽이나 그렇겠어요.”

세이딘은 가늘게 늘어뜨린 시선을 움직였다. 이티엘의 곁에는 새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사제복 차림의 노인이 서 있었다.

아무리 세이딘이 신전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지만 그만큼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대신관님까지 모셔왔으면서 말이에요.”

“허허, 그렇게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신의 이름에 맹세코 자매님께 해가 되는 행동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어쩌죠, 대신관님? 이렇게 불편함을 주시는 것부터가 해가 되는 일인데.”

“아니….”

“앞으론 맹세를 하실 땐 신중하셔야겠어요.”

노골적인 지적과 비아냥거림에 대신관의 주름진 얼굴이 깊어졌다. 언짢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돌아온 반박이 구구절절 옳았기 때문이었다.

세이딘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대신관을 힐끗 쳐다보다 다시 이티엘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붉은 시선에는 여전히 그녀를 향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세이딘은 속으로 참을 인을 중얼거린 뒤,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말했다.

“돌아가세요.”

“그럴 수 없어. 그대를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할 생각이니까.”

“그 말 진심이신 거죠?”

“그래.”

이티엘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세이딘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차…!’

뒤늦은 낭패감과 함께 후회가 밀려왔다. 어떻게든 세이딘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이티엘은 그녀가 재차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이딘에게는 머뭇하는 그 찰나가 기회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야무지게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세이딘은 드레스 자락을 뒤적였다. 사뭇 진지한 표정에서 큰 각오가 엿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티엘은 제 눈을 의심했다. 세이딘이 꺼내 든 것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새총이었다.

이티엘은 황당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피워 냈다.

“못 보던 사이에 흥미로운 걸 갖고 다니는군. 매우 귀여워. 악동같이 말이야.”

“…하아, 그러니까 이게 아니라고 했는데.”

세이딘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원래 단테에게 부탁했던 것은 위협용 마법 도구였다.

그러나 총이 없는 세계다 보니 아무리 설명한들 제대로 된 물건이 완성될 리 없었고, 많은 타협 끝에 그와 비슷한 용도이면서도 가볍게 휴대할 수 있는 새총이 만들어졌다.

‘그림이라도 잘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

세이딘은 의미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장전한 새총의 줄을 당겼다.

“오, 신이시여…!”

탄식 섞인 대신관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이티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두게, 그웨니르 영애. 그대에게 무기는 어울리지 않아.”

“폐하, 이건 무기 이전의 문제예요. 저는 분명 경고했어요. 더 이상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요. 그렇죠?”

“그랬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그러시겠죠.”

세이딘은 입가에 비웃음을 걸었다. 조금 나아졌다 생각했던 만큼 이티엘의 행동은 실망스럽다 못해 화가 솟구쳤다.

“그웨니르 영…….”

상냥하게 속삭이는 이름이 다 불리기도 전에 세이딘은 팽팽한 새총에서 손을 놓았다. 찰나의 행동이었음에도 이티엘은 기민하게 검을 뽑아 총알을 잘랐다.

“이런 건 내게 통하지 않아, 영애.”

“알아요.”

짧은 대답과 동시에 반으로 쪼개진 총알에서 흘러나온 형형색색의 연기가 오직 이티엘만을 노렸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것도 잠시, 가슴께가 뻐근해지는가 싶더니 점점 주변 풍경이 멀어졌고 모든 사물들이 평소보다 커졌다.

이티엘은 속이 울렁거렸다. 급격한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탓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 주위가 달라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이티엘은 천천히 제 손을 들었다. 굳은살로 가득했던 커다란 손 대신 보송보송하고 작은 손이 보였다.

‘무언가 잘못되었어.’

유성우처럼 스친 생각에 이티엘은 세이딘을 보았다. 싸늘하게 식은 눈매가 봄날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웨니르 영애, 이게 무슨….”

“경고를 듣지 않은 결과예요.”

이티엘은 커다란 눈을 깜박거렸다. 삐거덕거리는 머리를 겨우 재촉해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데 세이딘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마세요, 며칠 있으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거니까. 부디 그때까지는 그 모습을 즐겨 주세요.”

일말의 위안도 되지 않는 다독임이었다.

*  *  *

세이딘이 마법 도구를 필요로 했던 것은 이티엘을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본격적인 미친년의 모습을 선보이면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들어 있었다.

설명을 듣던 단테가 제안했다.

“여명의 지배자를 어리게 만드는 건 어떤가?”

“어리게요?”

“그래. 아무래도 그게 가장 정신을 차리기 쉬워질 것 같아.”

또 이런다.

세이딘의 눈이 가늘어졌다.

혼자 아는 말을 할 게 아니라 좀 더 설명을 곁들이라고 해도 단테는 곧잘 까먹곤 했다.

다행인 것은 그가 전보다 눈치가 늘었다는 점이었다. 세이딘의 언짢은 표정을 확인한 단테는 자신의 실수를 곧바로 깨닫고는 설명을 이어 갔다.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아무래도 황제는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아, 그래서….”

세이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왜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이 세계에는 더 이상 시나리오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영향력은 여전히 곳곳에 남은 채였다.

이티엘의 태도는 집착 모드가 발동하던 시절과 비슷했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심한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긴 하지만….”

세이딘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치를 떨었다.

“그때까지 못 참아요.”

“그래서 제안한 거다.”

“어려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어요?”

“신의 영향력이 희미해진다더군.”

그렇다는 것은 곧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는 말이었다.

“당신 말대로 할게요.”

평소라면 누군가에게 들은 듯한 투를 의아해했을 세이딘이지만 이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던 나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차여차 단테의 조언대로 이티엘을 어리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나는 당근이 싫다!”

단호한 앳된 외침에 세이딘은 지난 기억들을 내려놓고 현실로 돌아왔다.

티테이블 맞은편에는 작아진 이티엘이 당근 케이크를 앞에 두고 세상 잃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젖살이 빠지지도 않은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는 모습은 퍽이나 귀여웠지만 실상은 성인이자 황제라는 것을 아는 이상, 마냥 애처럼 대할 수 없었다.

“그럼 드시지 마세요. 제가 다 먹으면 되니까요.”

“음, 미미로군.”

이티엘은 눈을 길게 뜬 채로 단테를 노려보았다.

“왜 은의 현자가 여기에 있는 거지?”

세이딘 대신 단테가 대답했다.

“스승이 제자의 집에 방문하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웨니르 영애는 나와 이야기를 하기로 했어!”

“안다, 난 디저트를 음미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대화 나누도록 해.”

불만 가득한 이티엘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머리로는 전부 개소리라는 걸 아는데 어떻게 반박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게 다 그 연기 때문에…!’

단테가 만든 마법 도구는 몸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어려지게 만들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 이후로 하지 않던 당근 투정을 다 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세이딘.”

나직하게 들려오는 부름에 고개를 돌린 이티엘은 입술을 자근거렸다.

지긋지긋한 보랏빛 머리카락 아래로 빛나는 호박빛 눈동자가 세이딘을 향해 호를 그렸다.

“레이프!”

겨울처럼 냉랭했던 얼굴 위로 햇살 같은 미소가 드리웠던 것도 잠시, 세이딘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며칠 동안 안 보이더니 오늘은 어쩐 일이래?”

“미안해, 중요한 일이 있었어. 많이 화났지?”

“당연한 거 아냐? 어디 갈 거면 행선지는 말해 달라고 했잖아.”

두 사람의 말싸움에 이티엘은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아무리 마법에 홀려 있어도 허점은 있는 모양이었다.

“결혼식장을 찾느라 그랬어.”

심장이 저 밑으로 추락하는 느낌과 함께 이티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짙어지는 레이프의 미소를 보며 확신했다. 레이프는 일부러 이 상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티엘은 서둘러 세이딘을 보았다. 불만 가득했던 그녀는 어느새 표정이 누그러져 있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왔다.

“며칠씩 자리를 비웠으면 그만한 가치는 있겠지?”

물음을 던진 세이딘은 레이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티엘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세이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는 레이프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이야,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

“말 바꾸기 없기야?”

“물론이지.”

레이프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세이딘의 손등에 키스했다.

레이프와 세이딘 주위로 환한 빛이 흩뿌려졌다. 문제의 ‘결혼식장’을 보러 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웨니르 영애!”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이티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막아서는 바람에 세이딘과 레이프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주인공은 단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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