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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20)화 (120/122)

제120화. 외전1. 그들이 마음을 갈무리하는 법 (4)

이티엘은 황성에 오자마자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만스럽게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이티엘은 오히려 이 상황을 다행으로 여겼다. 무언가에 집중하다 보면 이런 술렁거림은 곧 가라앉을 테니까.

“어서 오십시오, 폐하.”

집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향긋한 차 향기가 코에 진동했다.

천천히 시선을 움직이던 이티엘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그의 시야에는 익숙한 청년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우리고 있었다.

“하마터면 티파티장으로 착각할 뻔했군.”

“이번에 피나로 왕국에서 새로 들여온 차입니다. 향이 좋아서 제일 먼저 폐하께 가져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이티엘은 눈썹을 씰룩였다. 어릴 적부터 함께한 친우는 노골적인 비아냥거림도 곧잘 부드럽게 넘기곤 했다.

이대로라면 린든에게 주도권을 뺏길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이티엘은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저 속이 시커먼 놈이 차를 운운하며 나타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티엘은 황제로서가 아닌, 친우로서 물음을 던졌다.

“여긴 어쩐 일이지? 차 핑계를 댈 생각은 하지 마. 바로 쫓아낼 테니까.”

“핑계라니요, 폐하. 저는 진심으로…….”

“린든 브누아.”

단호한 어투와 상대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한겨울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한동안 시선을 주고받던 린든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가에 어렸던 부드러운 미소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웨니르 영애와 대화가 어땠는지 물어보러 왔어. 그런데 반응을 보니 별로였던 것 같네.”

“별로인 정도가 아니라 심각했어.”

“어땠는데?”

이티엘의 머릿속에 세이딘이 스쳤다. 고요한 연녹빛 눈동자에 어린 분노가 만져질 듯 선연했다.

그 뒤를 이어 세이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상한 사람을 만드시네요. 제가 지금 흥분하며 말했던가요? 진정하셔야 할 건 제가 아니라 폐하세요.’

이티엘은 잠시나마 그 말에 동요했던 순간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대화를 이어 갈 수가 없었어. 어지간히 강력한 마법에 조종당하는 듯해.”

린든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단테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티엘의 발언과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이티엘은 그런 린든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못 믿겠다는 눈치군.”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어쩌겠나? 직접 본 게 아닌걸.”

솔직하면서도 뻔뻔한 린든의 대답에 이티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당겨진 실처럼 팽팽했던 신경이 조금 느슨해졌다.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해, 린든.”

“신경 쓰지 마,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니까.”

그렇게 말한 린든은 빈 잔에 차를 따라 이티엘에게 건넸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코끝을 간지럽히는 바닐라 향이 마음을 부드럽게 했다.

린든은 말없이 차를 마시는 친우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럴 때의 이티엘은 먼저 말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모락모락 피어나던 김이 사라지고 찻잔에 가득했던 차는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생각에 잠긴 채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이티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레이프 유클리드를 쓰러뜨려야겠어.”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어떤 일이든 능숙하게 대처하는 린든조차도 이번만큼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결혼 준비를 막는 게 아니라?”

“레이프를 쓰러뜨리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야. 그리고 그웨니르 영애도 자유로워지겠지.”

린든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대륙의 유일한 소드마스터이자 제르아일 제국의 황제가 어떻게든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주옥같은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극심할 줄이야…….’

세이딘과 대화를 하면 이티엘이 금방 현실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것이 안일했다.

린든은 스스로의 실책을 인정하고 곧장 다른 조치를 취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하나 따져 가며 뼈를 때리는 것뿐이었다.

“정말 그웨니르 영애를 위해서입니까?”

다시금 격식을 차린 물음에 이티엘의 미간이 깊어졌다.

“뭐?”

“폐하를 위한 행동이 아니고요?”

“린든, 무슨 말을….”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줄곧 부드럽고 정중하던 목소리가 가시처럼 날카로웠다.

“폐하께서 하시려는 계획은 조금도 그웨니르 영애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린든 브누아!”

이티엘이 언성을 높였지만 린든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이런 거에 위축될 것 같았다면 꺼내지 않았을 말이었다.

“그리고 그웨니르 영애가 조종을 당했다면 자취를 감춘 레이프 님을 그렇게 찾아다니지 않았을 겁니다. 마법의 영향력이 흐려졌을 테니까요.”

“레이프는 전설의 대마법사다. 그 정도쯤은…….”

“그걸 아시는 분께서 레이프 님을 쓰러뜨려야겠다고 하십니까?”

“…….”

추리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뻔한 말이었음에도 이티엘은 처음 들어 보는 것처럼 충격을 금치 못했다.

린든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꾸밈없는 진실을 쏟아 냈다.

“그웨니르 영애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폐하. 돌릴 수 없어요.”

두 사람 사이로 찬물을 끼얹은 듯한 서늘한 공기와 침묵이 감돌았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린든은 부디 이티엘이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길 바랐다.

그러나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친우로서 인내하는 건 여기까지네, 브누아 영식.”

실망감이 밀려오는 것도 잠시, 린든은 빠르게 마음을 추슬렀다.

이티엘이 저렇게 나오는 이상, 그도 더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방금 전은 폐하의 친우로서가 아니라 그웨니르 영애를 사모하는 사람으로서….”

“상당히 흥미롭네.”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을 물린 터라 집무실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한쪽은 필사적으로 현실도피 중이고, 다른 한쪽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데 그 이유가 내 약혼녀라는 게.”

말을 끝맺는 것과 동시에 책장에 은은한 빛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레이프였다. 언제부터 대화를 엿듣고 있던 건지 그는 책장용 사다리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레이프 유클리드…!”

상당히 아니꼽게 여긴 이티엘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날이 레이프의 목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푸르른 빛의 검기가 형형하게 넘실거리는데도 레이프는 놀라는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나른한 미소를 흘렸다.

“이렇게 열렬히 환영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티엘은 낮게 쏘아붙였다.

“결계는 어떻게 뚫었지?”

“맙소사, 농담이지?”

“…….”

말없이 노려보는 이티엘을 보며 레이프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모르겠나, 여명의 지배자? 레이프 님께서 뚫지 못할 결계는 없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던 레이프를 대신해서 말한 것은 단테였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집무실에 녹아든 그는 레이프의 곁에 섰다.

서로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사이로 여러 감정을 담은 기류가 흘렀다.

“우선은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군요.”

아슬아슬한 침묵 속에서 제일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린든이었다. 그는 이티엘과 레이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반응한 것은 검을 겨눈 쪽이 아닌, 위협을 당하는 쪽이었다.

“별건 아니고 한 가지 충고를 하러 왔어.”

“충고라고?”

이티엘의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래, 충고.”

감정이 가득한 붉은 눈동자가 따가울 법한데도 레이프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더욱 짙게 드러내며 말했다.

“부디 세이딘의 자비를 헛되이 하지 말았으면 해.”

“뭐…라고?”

순간 이티엘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세이딘의 자비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것보다도 신경에 거슬리는 건 그 말을 꺼낸 사람이 레이프라는 점이었다.

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거기까지 해라, 레이프 유클리드.”

“싫다면?”

깃털처럼 가벼운 레이프의 물음에 이티엘은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티엘의 검에 어린 검기가 한층 더 짙은 빛을 띠었다. 무언이었음에도 확실한 의사 표현이었다.

“안타깝네, 모처럼 신경 써서 한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니. 그런데 어쩌나?”

레이프는 짧게 탄식을 흘렸다. 호박빛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

“애초에 이건 세이딘을 위한 거라서 네 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

레이프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마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검날에 손을 댔다. 그러자 매섭게 일렁거리던 검기가 검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어떻게…!”

“역시 레이프 님!”

“…….”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본 실력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티엘은 대륙 최고의 소드마스터였다.

하지만 레이프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그를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침묵과 동요로 넘실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레이프는 찬찬히 각 사람을 훑었다.

마지막으로 마주한 이티엘은 검을 잃은 것을 수치스러워하면서도 레이프를 향한 전의를 꺾지 않았다.

‘포기를 모르네.’

레이프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는 저런 식으로 대적하는 자는 없었다.

예전 같으면 흥미로웠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날파리처럼 거슬렸다. 이 변화 끝에는 세이딘이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 황제.”

생각을 뒤로한 레이프는 소스라치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이티엘을 담은 눈동자는 그저 경고만이 가득했다.

“네 나라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이 이상 세이딘의 마음을 무시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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