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외전1. 그들이 마음을 갈무리하는 법 (3)
단테는 그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고 놀라면서도 곧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과연, 이런 거였어.”
“뭐가요?”
눈을 든 단테는 세이딘을 바라보았다. 경계와 의아함이 뒤섞인 표정이었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정적 속에서 단테는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일어나는 변화 말이다.”
“뭐…….”
세이딘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그런 그녀를 마주한 단테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아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 쓰게 된다던데 정말 그런 모양이야.”
정신이 혼미해진 세이딘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그것참….”
‘미치겠네.’
세이딘이 얼굴을 왈칵 구기자, 단테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난감해할 필요 없어. 네게 무언가 바라진 않아. 그랬다가는 레이프 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테니까.”
세이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단테를 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지금 그거, 농담이라고 한 말이에요?”
“그래, 너라면 알아챌 거라고 생각했다.”
“…….”
속으로 두 번이나 미치겠다고 생각한 세이딘은 결국 이마를 짚고 말았다.
“어디 가서 그러지 말아요.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니까.”
진지한 얼굴로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늘어놓는 단테와 그 말을 듣고 눈치게임을 하기 바쁜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단테는 진지하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알아듣기 난해한가?”
“난해한 게 아니라 아예 농담 같지 않아요.”
10명 중 9명은 진담으로 받아들일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단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이렇게 재미있는데 말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어떤 설명을 한들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세이딘은 그저 해탈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굳이 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단테는 세이딘을 좋아하지만 그만큼이나 레이프를 따랐다.
아무리 농담으로 치부하려 해도 방금 전에 했던 고백들은 전부 그 선을 넘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단테가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세이딘은 얼굴을 왈칵 구겼다.
그녀는 어떻게든 상대의 의중을 파악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결론은 별스러운 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단테는 이번에도 설명이 부족했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오해를 하는 건 좋지만 설명을 다 듣고 나서 해 주지 않겠나?”
“…알았어요.”
힘겹게 떨어진 허락에 단테는 얼굴이 환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삭막했던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것만 같았다.
실망시킬 수 없다는 비장함과 함께 단테가 말했다.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건 레이프 님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였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하고 술렁거려서 원인을 찾다가 알게 됐지.”
‘그걸 이제야 알다니…….’
세이딘은 할 말을 잃었다.
어쩜 그렇게 둔할 수 있는지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단테답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너무 늦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단테는 뜨끔해하는 세이딘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 딴엔 숨긴다고 숨기는 모양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다 드러났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마음은 조금도 그렇지 않더군. 그래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더 이상 어떤 여지도 없을 테니까.”
“아…….”
의심의 눈동자로 바라보던 세이딘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단테의 고백은 단순히 그녀가 알아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소리가 된 감정은 어떤 형태로든 답을 받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서 앞으로 나아간다고…….’
이제야 단테의 대답을 알아차린 세이딘은 무안하면서도 미안했다.
더 이상 ‘공략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은연중에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단테.”
세이딘이 입을 연 것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뒤섞인 퍼즐처럼 뒤죽박죽인 감정을 하나둘 맞춘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켜며 조심스럽게 마음을 드러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외면했어요. 원래 데스티니는 아티야의 것이었으니 시간이 지나면 관심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세이딘의 예상과 달리, 그들의 관심은 점점 깊어지면 깊어졌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레이프를 좋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를 똑바로 봐 준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건 전부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그냥 곤란하고 싫었어요. 이전 세계에서는 힘들게 살았으니까 여기서는 무조건 편하고 즐겁게 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작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에 띄니 얼마나 싫었겠어요?”
“그건 그렇지.”
순순히 인정하는 단테를 보며 세이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곤란한 이유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예전과 달리, 그는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넌 레이프 님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단테는 여전히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다.
세이딘은 찔리지도 않은 가슴에 손을 얹고는 볼멘소리를 냈다.
“역시나, 왜 그 말을 안 하나 했어요.”
“하하하.”
“웃는 척을 할 거면 좀 더 성의 있게 해요. 눈이 안 웃고 있잖아요.”
세이딘은 한숨을 폭 쉬었다. 단테가 안 하던 짓을 하면 그것은 대부분 레이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한차례 숨을 돌린 세이딘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
이번에는 단테가 할 말을 잃었다.
세이딘의 말대로였다.
원하는 만큼 구사할 수 있는 마법과 달리,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의도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절 좋아해 준 건 고맙지만 당신의 마음은 받을 수 없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그간 당신의 마음을 가벼이 여기고 외면한 것도요.”
세이딘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런 말과 행동으로 진심이 온전히 전해지지 않겠지만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침묵은 제법 길었다.
세이딘에게 고정되어 있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깜박였다.
“사과하지 마.”
단테는 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세이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갑자기 스며든 온기를 따라 세이딘이 고개를 들었다.
“좋아한 건 나다. 내 선택에 네가 미안해할 이유는 없어.”
단테는 세이딘의 눈이 휘둥그레질 새도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오히려 난 감사하게 생각해.”
“네?”
“너와 만나게 되어 지금껏 몰랐던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게 되었잖아.”
세이딘은 만감이 교차했다.
단테에게 저런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욱 크게 다가왔다.
“진지하게 답해 줘서 고맙다, 세이딘.”
담담하면서도 진솔한 대답은 세이딘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던 답답함을 단숨에 녹여 버렸다.
“…뭐예요, 정말. 그렇게 말하니까 제가 굉장히 악당 같잖아요.”
복잡미묘한 감정을 감추기 위한 투덜거림을 알아챈 단테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말까지는 한 적은 없다만.”
세이딘은 새초롬한 시선을 보냈지만 곧 단테를 따라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껄끄러웠던 공기가 서서히 누그러지는가 싶었다.
“너무 여명의 지배자를 나쁘게 생각하지 마.”
느닷없이 날아든 말에 세이딘 안에서 단테에 대한 평가가 후드득 떨어졌다. 눈치가 제법 늘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단테는 분위기를 흐리고도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그자는 그저 네게 마음이 있었던 만큼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서 그럴 뿐이야.”
“누가 몰라요?”
세이딘은 톡 쏘듯 반박했다.
누구나 받아들이기 버거운 상황 앞에서는 현실도피를 하곤 했다.
이티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자신의 책임을 그녀에게 전가하는 것은 도가 지나쳤다.
조금 전 실랑이가 떠오른 세이딘은 왈칵 얼굴을 구겼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누구보다 마법에 취약한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원치 않아도 그도 조만간 받아들이게 될 거야. 그러니 그런 말에 개의치 마.”
어깨를 도닥이는 단테의 손길에 세이딘은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싫은 마음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어서 턱을 괸 채 단테의 조언에 따라 이티엘의 과거를 떠올렸다.
이티엘은 거침없는 행동과 집착을 보여 주긴 했지만 어떻게든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세이딘을 진심으로 대하려 노력했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요?”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기억들이 있었음에도 세이딘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의심이었다.
방금 단테가 보여 준 모습으로 인해 여러모로 자신의 생각이 옳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불안은 여전히 커서 가슴을 헤집었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시선과 마주한 대마법사가 입을 달싹였다.
“레이프 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시겠지.”
“…역시 그렇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면서도 세이딘은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레이프가 개입하면 일이 커질 것 같아 알아서 하려 했는데 이래서는 힘들 것 같았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세이딘이 말했다.
“단테, 부탁할 게 있어요.”
“뭐지?”
“마법 도구를 좀 빌려줬으면 해요.”
단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세이딘은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