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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18)화 (118/122)

제118화. 외전1. 그들이 마음을 갈무리하는 법 (2)

“세이딘을 유혹할 생각인가?”

“그럴 리가요.”

린든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오후의 햇살처럼 밝은 평소와 달리 냉소적인 태도였다.

단테와 시선을 마주한 린든이 말을 이었다.

“그분께 제 감정을 밀어붙일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저 마지막으로 제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린든의 눈동자는 일말의 미동도 없이 확고했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어진 단테는 그제야 본심을 드러냈다.

“나와 같군.”

“네?”

“마음만은 전하겠다는 것 말이야.”

린든은 단테의 대답을 곱씹고 나서야 놀라는 표정을 드러냈다. 일상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지라 하마터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놓칠 뻔했다.

“그렇군요.”

단테를 한참 바라보던 린든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대답들은 전부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나저나 그 전에 폐하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할 텐데요.”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린든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이티엘은 린든의 오랜 친우이자 동시에 주군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이딘과 관련된 일만큼은 예외였다.

지금은 이티엘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돕고 있지만, 만약 그가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을 고집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주군을 향해 검을 겨누는 일이 될지라도.

*  *  *

그웨니르 저택 앞에 선 이티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린든과 단테 앞에서는 세이딘을 만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정작 실행에 옮기려니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저 짐작하는 것과 당사자에게 사실을 듣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심호흡을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뭐 하세요, 폐하?”

이티엘은 퍼뜩 놀라서 앞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세이딘이 철창 너머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어.’

깊게 잠이 들었을 때도 침입자들의 기척을 읽었던 이티엘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감정에 휩쓸려 허우적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 오랜만이야, 그웨니르 영애. 잘 있었나?”

“전 잘 지냈답니다. 이렇게 쉬어도 되나 싶을 정도예요.”

장난스러운 대답과 함께 대문이 열렸다.

말에서 내린 이티엘은 저택의 사용인에게 고삐를 맡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레이프 유클리드가 안 보이는군.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레이프라면 잠시 마탑에 갔어요. 요즘 여러 가지로 준비하느라 바빠서요.”

여상히 스쳐 간 대답에 이티엘은 마음이 덜컹거렸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 그를 보며 세이딘이 물었다.

“혹시 레이프에게 용건이 있으신가요?”

“아니. 내가 볼일이 있는 건 그대뿐이다.”

빛처럼 빠르고 단호한 대답에 토끼처럼 놀란 세이딘은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잘됐네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럼 가실까요? 오늘은 날씨도 좋아서 정원에 다과를 준비해 뒀어요.”

이티엘은 정원으로 안내하려던 세이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의아한 시선과 마주한 그가 말했다.

“짧은 거리지만 에스코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나, 그웨니르 영애?”

정중한 물음과 완벽한 미소에 세이딘은 잠시 주춤거리는가 싶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내민 손을 잡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하지만 세이딘의 예상과 달리, 정원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지?’

그럴수록 이티엘은 서두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했고.

‘이번엔 무조건 마지막이라 여겨지게끔 거절해야지.’

세이딘은 확실하게 거절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윽고 정원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웨니르 영애.”

“폐하.”

동시에 흘러나온 부름에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말씀하세요, 폐하.”

“아니야, 그대부터 말하도록 해.”

“일개 영애인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먼저 말씀하세요.”

“내가 허락을 하는데도 말인가?”

“제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오신 건 폐하잖아요. 아닌가요?”

신경전으로 변질된 양보 속에서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이티엘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로 찾아왔으니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티엘은 에스코트하던 세이딘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고 입안에서 맴돌던 말을 털어놓았다.

“실은… 그대가 레이프 유클리드와 결혼한다는 소문을 들었네.”

속이 뻥 뚫리는 듯한 감각은 무척이나 시원했지만, 곧 여러 마음들이 텅 빈 자리를 채웠다.

이티엘은 술렁이는 감정을 애써 감추고 상대를 마주 보았다.

한여름 피어난 새싹처럼 푸르른 연녹빛 눈동자가 차분하게 그를 비추고 있었다.

긴장으로 고조된 심장 소리를 따라 세이딘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귓가로 스며든 대답에 이티엘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고 물었다.

“진심인가?”

“저도 얼떨떨하긴 한데 어쩌겠어요, 마음이 그런걸.”

“…그웨니르 백작도 이 사실을 아나?”

“부모님은 제 선택이니 존중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폐하….”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이로군.”

“그게 무슨…?”

뜬금없는 중얼거림에 거절할 타이밍을 놓친 세이딘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티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할 말을 쏟아 냈다.

“그웨니르 영애, 그대는 마법에 조종당하고 있어.” 

“…네?”

세이딘은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반박을 할 수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극심할 줄은 미처 몰랐다.

‘많이 놀란 모양이군.’

한편 이티엘은 세이딘이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폭로로 인해 충격을 받았다고 착각했다.

‘그럴 만도 하지. 마법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마법에 걸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니.’

지레짐작으로 더욱이 착각을 키운 이티엘은 세이딘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침착하고 부드럽게 설명을 이어 갔다.

“당황스러운 마음은 이해해, 그웨니르 영애. 마법은 안개비처럼 스며들어서 인지하기 어려울뿐더러 알아챈다 해도 떨쳐 내기 어렵지. 하지만 나는 결코 그대를 마법에 휩쓸리도록 두지 않을 거야.”

‘뭐라는 거야?’

세이딘은 미간을 찌푸렸다. 황당하면서도 우스웠던 이티엘의 오해는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세이딘은 이티엘을 제지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나직한 부름에 한창 설득에 심취한 이티엘이 멈췄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줬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렇지만 세이딘은 조금도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건 폐하의 생각일 뿐이에요.”

“그웨니르 영애, 진정하고 내 말을….”

“이상한 사람을 만드시네요. 제가 지금 흥분하며 말했던가요? 진정하셔야 할 건 제가 아니라 폐하세요.”

단호하게 상황을 짚은 세이딘의 눈동자가 첨예하게 번뜩였다.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이티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티엘은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이상 할 말은 없으니 돌아가 주세요.”

세이딘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리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해도 그렇지,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이티엘과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세이딘은 황망한 표정의 이티엘을 위아래로 훑는가 싶더니 곧장 저택을 향해 등을 돌렸다.

“잠깐, 그웨니르 영…!”

“거기까지만 하도록 해, 여명의 지배자.”

세이딘을 쫓으려던 이티엘은 제삼자의 팔에 의해 저지당했다. 새카만 옷자락을 따라 올라간 시선 끝에는 단테가 있었다.

예기치 않은 상대와 마주친 이티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놔라, 은의 현자.”

“세이딘이 싫어하니 그럴 수 없다. 그리고 목적은 달성한 것 아니었나?”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단테의 물음에 이티엘이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살짝 깨문 아랫입술로 초조함이 엿보였다.

“…오늘은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짙은 침묵 끝에 한마디를 쥐어짠 이티엘은 저택을 뒤로했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이 이윽고 자취를 감추자, 세이딘은 그제야 참고 있던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 고마워요, 단테. 덕분에 살았어요.”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단테는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이티엘을 저지했던 팔을 내렸다.

숨을 고르며 안정을 찾아가던 것도 잠시, 방금 전 일이 다시금 떠오른 세이딘은 왈칵 얼굴을 구겼다.

“아니, 내가 레이프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이상하다기보다는 얼떨떨하지.”

세이딘의 미간은 더욱 깊어졌다. 충동적으로 던진 질문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영 시원찮아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호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단테가 한마디를 던졌다.

“설명이 부족했군.”

“…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 미안하다.”

너무도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 가는 단테의 말에 세이딘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테, 어디 아파요?”

“난 건강하다.”

“그럼 뭐 잘못 먹었어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히는 질문이었지만 이런 일에 익숙해진 세이딘은 곧장 대답을 내놓았다.

“그야 당신이…, 제 눈높이에 맞추려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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