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외전1. 그들이 마음을 갈무리하는 법 (1)
“뭐…라고?”
부정으로 가득한 낮은 울림이 황제의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이티엘이 충격에 휩싸인 채 깃펜을 쥔 손을 떠는 반면, 린든은 무척이나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웨니르 영애가 레이프 님께 프러포즈를 받았다고 합니다.”
“알아들었으니 다시 설명하지 말게, 브누아 영식.”
“그리고 이제 막 결혼 준비를 시작하셨고요.”
“뭐…?!”
이제 이티엘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세이딘 그웨니르에게 괜찮으니 더는 오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고작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레이프가 돌아왔다는 소식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티엘은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실타래처럼 엉킨 생각을 정리한 그는 사뭇 진지하게 운을 뗐다.
“아무래도 마법에 조종당하는 모양이군.”
“예…?”
뜬금없는 결론에 반사적으로 대답한 것도 잠시, 린든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래도 그의 주군이자 친우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나머지 회피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이티엘의 안쓰러운 몸부림이 이어졌다.
“그웨니르 영애는 매사에 신중하고 경계심이 많네. 그런 그녀가 급진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에메랄드의 상단주가 하는 말이라면 사실이다.”
느닷없이 날아든 대답은 민망하다 싶을 정도로 뼈 때리는 진실만으로 가득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책장 사이에 균열이 생기는가 싶더니 은빛의 남자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이티엘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대화를 엿듣는 게 취미인가 보지, 대마법사?”
“의뢰한 물건을 전달하러 온 것뿐이다. 빠른 시일 내로 완성해 달라 했으니 말이야.”
단테는 담백한 설명과 함께 손에 쥔 상자를 열었다. 영롱한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다이아몬드는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다.
“아무래도 쓸모가 없어진 것 같지만.”
단테의 한마디에 복잡한 표정으로 다이아몬드를 보던 이티엘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패었다.
공감 능력은 지능 순이라던 세이딘의 말이 이제는 의아하기보다 공감이 갔다.
한편 반지와 단테, 그리고 이티엘을 번갈아 가며 보던 린든은 탄식을 터뜨렸다.
“폐하, 이런 중대사를 몰래 준비하시다니요! 중신들과 대립하는 것이 아무리 껄끄럽다지만 적어도 제겐 말씀해 주셨어야죠.”
“그래서 말 안 한 거네. 어느 멍청이가 연적에게 프러포즈 예고를 하겠나, 브누아 영식.”
“하하, 저를 그리 높이 쳐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지금 날 놀리는 건가?”
“그럴 리가요, 순수한 감격과 칭찬입니다.”
진정성 넘치는 주장과 그렇지 못한 표정에 이티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릴 적부터 함께해 온 세월이 있다 보니 너무 확연히 눈에 보였다.
그러나 린든은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껏 물음을 던졌다.
“이제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어떡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이미 세이딘은 결혼을 결심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며 응원하는 것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이티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웨니르 영애의 결혼을 막아야겠어.”
정적을 깨고 날아든 대답에 린든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탄식을 집어삼켰다.
‘저건…. 글렀군.’
마주한 시선은 마치 건물의 초석처럼 견고했다. 린든은 저럴 때의 이티엘은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입을 열었다.
“저도 돕도록 하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이티엘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
의문 어린 시선과 마주한 린든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설득이 소용없다면 이렇게라도 현실을 깨닫게 하는 수밖에.
“그웨니르 영애와 만나십시오.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하니까요.”
* * *
“하아….”
응접실에 짙은 탄식이 흩어졌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탄식의 주인공인 세이딘은 유감스러워하면서도 빠르게 수긍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고는 생각하던 차였다.
사실 그보다 궁금한 점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의뢰받은 내용을 말해도 되는 거예요?”
“괜찮다. 의뢰보다 중요한 건 레이프 님이니까.”
단호하고 산뜻한 대답을 마친 단테는 기대로 가득 찬 시선으로 세이딘의 옆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이프는 싱긋 웃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레이프 님. 언제든 돕겠습니다.”
둘만의 세계를 조성하는 두 사람을 보며 세이딘은 얼굴을 구겼다. 얼굴에는 ‘참으로 가지가지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언제쯤 움직인대?”
“그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만 지금까지 그자가 보인 행동을 생각하면 2, 3일 내로 찾아올 겁니다.”
레이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봐 온 이티엘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 남았다.
그동안 레이프가 봐 온 이티엘은 상당히 끈질겼다.
데스티니의 효과가 사라진 이후에도 세이딘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한 데다가 결혼할 거라는 소식을 듣고도 저렇게 부정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이렇게 된 거 이번에 제대로 싹을 잘라 버려야….”
눈을 번뜩이는 레이프를 향해 세이딘이 말했다.
“레이프는 나서지 마.”
“세이딘?”
레이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일이라면 어떻게든 회피하려던 세이딘이 먼저 나서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괜찮겠어?”
“안 괜찮지만 어쩌겠어? 네가 나서면 더 안 좋아질 텐데.”
“유감스럽네, 피앙세에게 이 정도로 신뢰가 없을 줄이야.”
“피, 피앙….”
얼굴을 붉힌 것도 잠시, 세이딘은 단테가 아직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잘 들어, 레이프! 난 되도록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어. 되도록 눈치 볼 일은 안 만들고 싶고.”
“내가 함께 있는데 네가 눈치 볼 일이 뭐가 있어? 그리고 사는 곳이야 옮기면 그만이야.”
세이딘은 얼굴을 구기는가 싶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난 부모님을 걱정하는 거야. 네 말대로 나야 어디든 가서 살면 그만이지만 우리 부모님은 제국의 귀족이야. 나 때문에 힘들어지지 않았으면 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세이딘….”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감격하는 레이프의 반응에 세이딘은 머쓱해했다.
“으흠! 그러니까 우선 내게 맡겨 줬으면 좋겠어. 시도해도 안 되면 그때 도와줘.”
“그래, 알았어.”
레이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단테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세이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제를 주시하도록 해.’
그럼에도 단테는 빠르게 이해하고는 수락의 눈짓을 보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벌써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단테를 보며 세이딘이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에 단테는 의아함을 드러냈다.
“왜 그러지, 세이딘? 다른 용건이라도 있나?”
“아뇨, 그건 아닌데…. 곧 있으면 사과 타르트가 나올 거라서요. 안 먹고 갈 거예요?”
변화가 미미한 단테의 얼굴에 놀라움과 감탄이 어렸다. 단테는 그웨니르 저택의 사과 타르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직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때문에 이어진 변명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점심을 아직 안 먹었군.”
레이프는 자신의 말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단테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앞으로도 저만큼만 둔했으면 좋겠네.’
연적을 상대하는 건 이티엘과 린든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레이프는 알지 못했다.
‘세이딘이 날 챙길 줄이야…….’
레이프를 존경하는 마음이 심히 도드라져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단테는 이미 세이딘에 대한 감정을 깨닫고 있었다.
* * *
사과 타르트를 먹고 그웨니르 저택을 나선 단테는 곧장 헤브론 상단으로 향했다.
이미 몇 번의 거래를 통해 안면을 트다 보니 상단의 사람들은 단테를 곧장 린든에게로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단테 님. 어쩐 일이십니까?”
린든은 집무실에 들어선 단테를 보자마자 상냥한 미소를 지어냈다.
단테는 안내받은 소파에 앉으며 여상히 대꾸했다.
“황제가 찾아가면 세이딘이 직접 상대하겠다고 하더군.”
“레이프 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셨을 텐데요?”
“자신이 직접 마무리 짓고 싶다고 했다. 레이프 님께서 나서면 골치 아파진다면서 말이야.”
“하하, 정말 그웨니르 영애다운 대답이로군요.”
온화한 얼굴에 퍼지는 웃음은 진심으로 유쾌한 것처럼 보였다.
린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테가 물음을 던졌다.
“이젠 어쩔 생각이지?”
“영애의 대답에 따라 어떤 식으로 결혼을 방해할지 정하고 실행할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에 린든은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서라면 이미 황궁에서 몇 번이고 설명했을 터였다.
“뭘 묻고 싶으신 겁니까?”
“여명의 지배자에게 말하지 않은 진실을 원한다.”
린든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단테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치가 빠른 줄은 몰랐다.
사람을 보이는 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린든은 작은 한숨을 터뜨렸다.
“그웨니르 영애의 결혼을 방해한다고 한 건 단지 폐하를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한 구실일 뿐,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제가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한들 전설의 대마법사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라서요.”
솔직한 대답을 했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고요한 푸른 눈동자였다.
웃음으로 얼버무리기에는 단테의 시선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고 결국 린든은 백기를 들었다.
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사실이었다.
“실은 그웨니르 영애에게 고백하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