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20장. 에필로그
모든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중에서도 악역을 해치운 이야기는 대부분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야기’에서나 통용될 뿐이었다.
게임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된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의 세계는 엔딩을 넘어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는 무슨.
“오늘도 아름답군, 그웨니르 영애.”
“좋은 아침입니다, 영애.”
저택 앞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두 미남의 모습에 가슴이 고구마라도 먹은 듯 턱 막혔다.
레이프가 봉인을 풀고, 시나리오와 시스템창이 사라진 지 어언 3개월. 데스티니의 힘이 사라졌는데도 저놈들의 콩깍지는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가씨, 표정!”
앤이 화들짝 놀라며 주의를 줬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은 좋아하는 작가인 디오레의 신간이 출간되는 것과 동시에 사인회가 열렸다.
선착순 100명 한정이어서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이런 타이밍에 나타날 줄이야.
‘이놈들은 진짜 날 좋아하는 게 맞나? 괴롭히려는 게 아니고?’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아침에 오시다니. 참…, 한가하신가 봐요.”
옆에 선 앤이 한층 더 경악에 찬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무시했다. 사인본이 물 건너간 마당에 저놈들에게 차릴 예의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영애와 점심이나 함께할까 해서 왔는데…… 아무래도 외출하려던 중이었나 보군.”
점심이 되려면 4시간은 족히 남았거든요?
“난감하군요,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러면서 절대 간다는 소리는 안 하네.
그럼 별수 있나? 내가 해야지.
“네, 일이 있어서요. 그러니…….”
“혹시 이거 때문인가?”
이티엘의 물음에 나는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박여도 보이는 것은 살 예정이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티엘이 보란 듯이 표지를 넘기자, 작가인 디오레의 보배로운 사인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약소하지만 영애가 좋아하는 시나몬하우스 한정판 딸기 케이크를 가져왔습니다. 바쁘시지 않다면 식후에 함께하도록 하죠.”
하! 누가 이런 걸 가져오면 좋아할 줄 알고?
씩씩거리는 마음과 달리, 본능에 충실한 입은 멋대로 달려 나갔다.
“어머나, 얼마든지요! 당장 점심을 준비시키도록 할까요?”
…놀랄 만큼 데스티니를 잡기 전과 다를 바가 없는 일상이었다.
아니, 오히려 익숙하다 못해 길들여지고 있는 걸 수도.
* * *
이티엘과 린든은 하늘이 서서히 주황빛으로 물들어 갈 때쯤이 되어서야 저택을 나섰다.
“좋은 시간이었네, 그웨니르 영애. 그럼 또 보도록 하지.”
“됐고요, 그럴 시간에 국정을 돌보세요.”
“하하, 깊이 새기겠네.”
깊이 새기겠다는 것치고는 영혼이 1g도 안 느껴지는데?
이티엘은 의심으로 가득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짧은 인사를 던지고는 마차로 향했다.
“그럼 그웨니르 영애, 푹 쉬도록 하십시오.”
“저, 브누아 영식!”
이티엘의 뒤를 따르려던 린든은 갑자기 불러 세우는 날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수없이 고민한 일이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매일 찾아오지 않으셔도 돼요.”
상냥한 갈색 눈동자가 눈에 띄게 동그래졌다.
이티엘과 린든이 매일 찾는 데는 날 좋아해서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시나리오와 결착을 짓고 이 세계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이프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면서부터는 어떻게든 레이프와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그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세이딘. 레이프 님을 찾는 건 내게 맡기고 넌 푹 쉬도록 해.’
내가 퍽이나 안쓰러웠는지 단테는 마법사들을 동원해 레이프를 찾아 나섰다.
이에 질세라 이티엘과 린든 또한 하루가 멀다고 날 찾아왔고,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한참 나를 살피던 린든이 걱정을 내비쳤다.
“하지만….”
“두 분껜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줄곧 절 살펴 주셨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안 그랬으면 제가 사인회를 갈 생각을 했겠어요? 뭐, 결국 작가님은 뵙지 못했지만.”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어찌 됐건 작가님의 사인은 건졌으니까요.”
나는 이걸로 아까의 원한을 털어 버리기로 하고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제 절 찾아오지 마시고 본래의 일에 집중하세요.”
린든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씁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일말의 여지도 없군요.”
“전 헛된 희망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내가 여지를 줬다면 그건 시나리오에게 신나게 휘둘리던 시절이겠지.
“레이프 유클리드 님을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느닷없는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어떻게 하면 방금 전 대화에서 저렇게 넘어갈 수 있는 거지?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곧 정신을 추스르며 미소 지었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그건 지금 할 만한 말이 아닌 것 같아요.”
나는 그놈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은 게 없거든.
린든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부드럽게 휘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린든과 내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그웨니르 영애.”
어색한 기류 속에서 나를 부른 린든은 말을 이어 갔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퍽이나 조심스러운 모습에 무심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과한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면요.”
“폐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옅은 웃음을 흘린 린든은 인사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나는 멀어지는 마차의 모습을 보며 작은 한숨을 터뜨렸다. 귀찮아도 매일같이 보던 얼굴을 내일부터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시원섭섭했다.
“힘내자.”
마른세수와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눈에 힘을 꾹 주었다.
내일은 단테를 찾아가 레이프 찾기가 어느 정도 진척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 전에 책부터 읽어야지!”
얼마나 기다린 작가님의 신작인데!
생각을 전환하고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어…?”
방에 도착한 나는 눈을 깜박였다.
디오레의 신간이 고이 모셔진 테이블 위에 원래는 없었을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이티엘이나 린든이 두고 간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봉투를 뜯었다.
‘제발 러브레터만 아니었으면!’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편지의 내용은 핑크빛이 폴폴 나는 것이 아니었다.
“고생 끝, 행복 시작…? 뭐야, 이게.”
러브레터가 아니라고 좋아했더니 더 요상한 게 왔네.
“대체 누가 이런 걸….”
“하여간 센스 없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동안 듣지 못했던 맑고 또렷한 저음이었다.
“단테에게 편지 쓰는 법 좀 익히라고 해야겠어.”
나는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창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뉘엿뉘엿 떨어지는 노을을 등지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를 보며 남자는 아름답게 달을 그렸다.
“어떻게 생각해, 세이딘?”
입안을 맴돌던 이름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레이프…?”
“응, 나야.”
귓가에 또렷하게 스미는 대답과 달리, 정신은 현실과 동떨어진 채였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레이프가 나직하게 웃었다.
“많이 놀란 모양이네.”
“그걸 말이라고…!”
저만치 있던 현실감이 단숨에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
“이 나쁜 놈아!”
나는 밀려오는 감정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지척까지 다가온 레이프의 등짝을 후려쳤다.
“누가! 갑자기! 없어지래! 어?!”
“잠깐, 세이….”
“사람이 큰맘 먹고 고백했더니 사라져?! 그러고도 인간이야? 숨은 왜 쉬어?”
“실은…, 악! 미안해, 세이딘!”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레이프를 때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괘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왜 갑자기 없어졌는지 5자 이내로 설명해.”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말하는데 레이프는 뭐가 좋은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금 웃어?”
“…아니.”
레이프는 나를 따라 정색하더니 망토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검은 벨벳으로 된 작은 상자였다.
“이거 때문에.”
완벽하게 다섯 자로 떨어지는 설명은 의문만 가득 남겼다.
“납득시키라고 하진 않았잖아.”
“그건…, 그렇지.”
짜증이 났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다소 복잡미묘한 마음이었다.
“한번 열어 볼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선지 의지와 상관없이 가슴이 떨렸다.
‘왜 이렇게 줏대가 없니!’
나는 스스로를 타박하며 건네받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연둣빛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이건….”
“그린 드래곤의 심장으로 만든 반지야.”
“…네?”
아까부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답만 듣고 있는 기분인데.
더 이상 인내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나는 다시 한번 감정을 터뜨렸다.
“레이프, 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했다.
레이프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혼돈에 휩싸인 와중에도 머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린 드래곤의 심장으로 만든 보석.
반지.
무릎 꿇은 레이프.
이 세 가지가 뒤섞이며 가져온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아니지?”
부정하는 내게 레이프는 단호한 표정으로 쐐기를 박아 버렸다.
“맞아, 프러포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려는 찰나, 레이프는 빠르게 설명을 이어 갔다.
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어떻게든 내게 가장 값진 것으로 프러포즈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결과가 그린 드래곤의 심장을 세공한 반지였던 거고.
왜 그린 드래곤이었는지도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내 눈동자와 닮아서였다.
설명을 다 들은 나는 안도와 허탈한 한숨을 터뜨렸다.
“앞으로는 이런 짓 하지 마.”
“왜? 맘에 안 들어?”
“그런 이유가 아니잖아!”
레이프가 뛰어난 대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위험한 일은 얽히지 않길 바랐다.
“세이딘….”
“내게 중요한 건 이런 것보다 너야.”
나를 조심스레 살피던 레이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었다.
그래,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겠지. 나도 몰랐는걸.
북받치는 감정과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눈가가 시큰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 보려 눈에 힘을 힘껏 주었다.
“그러니까 다시는 말없이 사라지지 마.”
“…알았어.”
나는 대답을 듣자마자 레이프를 꼭 끌어안았다.
“어서 와, 레이프.”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다녀왔어, 세이딘.”
-<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본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