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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15)화 (115/122)

제115화. 19장. 망한 게임을 위한 솔루션 (8)

“뭐?”

말해서 뭐 하니, 입만 아픈데.

이런 때는 말보다 행동이 최고였다.

‘사용법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생각을 갈무리하고 밀려오는 연기를 향해서 페널티 무효권을 들이밀었다.

기본적이고 고전적인 방법이었음에도 효과는 훌륭했다.

볼품없이 구겨진 종이는 내 손을 벗어나 허공에 빛을 흩뿌렸고, 주위를 덮은 검은 연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라지는 연기 너머로 보이는 시나리오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바르르 떨었다.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이제 충격을 넘어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나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활짝 웃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페널티 무효권을 주워 시나리오를 향해 펼쳐 보였다.

“어머나, 어쩌나? 페널티가 통하지 않네?”

“마,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 어디 있어? 당장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그런데.”

시나리오는 말문이 막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더욱 보란 듯이 미소 지었다.

시나리오는 아티야의 대역을 시키던 내게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레이프 또한 완벽하지는 않아도 시나리오의 의지를 벗어나 세계를 구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레이프를 제압할 유일한 희망이었던 페널티까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으니 시나리오가 이 이상 전의를 불태우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흔들리는 동공과 함께 시나리오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이건 꿈이야!!”

현실을 부정하는 시나리오의 외침이 처절하면서도 우스웠다.

“살다가 신에게서 저런 말을 들을 줄이야.”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레이프가 던진 한마디는 냉소로 가득했다.

‘게임’ 혹은 ‘이야기’ 속 인물이라는 이유로 오랜 시간 억압당했으니 끔찍하게 여길 만도 했다.

“아아악!!”

실성한 듯 소리를 지르는 시나리오를 뒤로하고 레이프에게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을 건넸다.

의아한 호박빛 시선과 마주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종지부를 찍고 싶다 했잖아.”

“세이딘….”

“사용법은 알 테고. 다 쓰고 나면 돌려줘.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레이프의 시선이 과하게 뜨거운 나머지 나는 숨도 안 쉬고 설명을 쏟아 냈다.

어떻게든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간질거리는 마음이 찾아드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미동도 없이 한참을 쳐다보던 레이프는 굳건하던 입을 달싹였다.

“역시 네가 아니면 안 돼.”

“뭐?”

“좋아해, 세이딘.”

레이프가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곧장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힘으로 나를 제 품에 끌어당겼다.

귓가에 닿은 온기와 심장 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럼 다녀올게.”

영원과도 같은 찰나가 흐른 뒤, 내게서 떨어진 레이프는 무척이나 후련한 표정으로 시나리오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방금…….’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나는 뒤통수를 후드려 맞은 것처럼 멍하니 있었다.

정체된 사고는 레이프가 시나리오와 마주 서고 나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대, 대체 그런 말을 왜 이런 타이밍에 하는 건데?!’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엉뚱한 행동을 한 레이프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떠나간 온기가 너무나 아쉽다고 생각해 버린 자신 때문이었지.

‘아, 정말….’

모든 것이 멈춰 버렸으면 하는 내 바람과는 달리, 시간은 착실하게 제 갈 길로 흘러갔다.

“정말 길었어.”

시나리오와 마주한 레이프가 운을 뗐다.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요원한 세월을 헤아리듯 깊었다.

미친 듯이 난동을 부렸던 시나리오는 더 날뛸 힘이 없음에도 경계와 허세를 가시덤불처럼 세웠다.

“고작 그런 단검으로 날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고작이라고 하기엔 너무 떨고 있는데.”

“그, 그렇지….”

“그만.”

레이프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네 이야긴 들을 만큼 들었어. 그러니….”

흐려진 말끝을 따라 시나리오의 얼굴이 더욱 파리해졌다.

레이프는 모든 것을 태운 재처럼 공허해진 시나리오에게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을 겨누었다.

“이제 끝내자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기나긴 악연이 베였다.

*  *  *

“솔직히 의외야.”

나는 무너져 가는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자 태연한 물음이 돌아왔다.

“뭐가?”

“신을 죽이지 않고 연만 끊어 낸 것 말이야.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원수잖아.”

레이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굳이 내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때로는 살아가는 게 죽음보다 괴롭기도 하잖아?”

으와아, 세상에.

“그건… 그렇지.”

속으로 마른 탄식을 터뜨리면서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프의 행동을 잘못됐다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나 또한 같은 선택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세이딘, 힘들면 내가 할까?”

내 얼굴이 어지간히도 좋지 않았는지 레이프는 찬란했던 미소를 거두었다.

“아냐, 이건 내가 해야 해.”

그래야 모든 것을 제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레이프에게 돌려받은 단검을 쥐고 시나리오에게 몸을 돌렸다.

레이프와 연이 끊긴 그녀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듯했다.

가슴 한구석에서 동정심이 스멀스멀 밀려오던 것도 잠시, 나는 빠르게 그 마음을 쳐냈다.

자비를 베풀기에는 겪은 일이 많았고, 이곳이 무너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이올린과 꽃미남들> 세계의 모든 것과 시나리오 사이의 연을 끊는 거야.’

심호흡을 반복하며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을 쥔 손은 어느새 긴장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은 후 단검을 꾹 쥐고 휘둘렀다.

허공을 휘젓는 소리가 무안하리만치 고요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의 효과는 확실했다.

시나리오의 머리에서 실 가닥처럼 얇은 빛이 셀 수 없이 쏟아지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미 레이프를 통해 본 적이 있는 과정이었기에 놀라운 건 없었다.

흩어진 빛들을 마지막으로 시나리오의 몸이 흐려졌다.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방인.”

“으아악!”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러 버렸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겨우겨우 진정시키고 나서 시나리오를 노려보았다.

“넋을 놓을 거면 끝까지 그렇게 있지 왜 갑자기….”

“이야기를 벗어난 게임은 머지않아 망가질 거야.”

아무래도 시나리오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전의를 영혼까지 끌어모으기 위해서였나 보다.

그런데 어쩌나? 난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데.

“과연 그럴까?”

“뭐?”

놀라는 시나리오 너머로 무너져 내리는 하얀 장소가 보였다.

나는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굽혔다.

“어떤 곳으로 흘러갈지는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이 정하는 거지 네가 아니야.”

“이…!”

시나리오는 지지 않고 반박을 하려 했지만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흐릿해진 형체에 이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충격 가득한 얼굴로 입을 벙긋거리는 시나리오에게 포식자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 네가 가진 모든 게임을 해방시키지 않은 걸 감사하도록 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나리오의 모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또로롱!

사람 마음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지긋지긋했던 알림음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마지막 이벤트 – 길 밖으로 클리어!]

여기까지 온 당신에게 깊은 찬사를 표합니다!

‘정말…, 끝이구나.’

방금 전 시나리오가 사라질 때까지만 해도 별 감흥이 없던 가슴이 크게 울렁거렸다.

나는 밀려오는 만감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보상을 알리는 알림음이 보채듯 이어졌지만 들여다볼 정신은 없었다.

“수고했어, 세이딘.”

가볍게 어깨를 도닥이는 큰 손길에 맹수처럼 날뛰던 마음이 마법처럼 가라앉았다.

숨을 고르며 눈을 들자, 레이프가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해방감과 안도감으로 인해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로 괜찮았어?”

정신을 추스르는 가운데, 레이프가 물음을 던졌다. 시나리오와의 대화에 대한 것임을 깨닫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 이미 다 끝난 마당에 구구절절 말해 봐야 뭐 해. 찍소리도 못 하게 하는 게 낫지.”

“푸흡…!”

이놈 봐라? 사람이 모처럼 진지하게 말하는데 비웃어?

박장대소를 터뜨린 레이프를 노려보다가 작은 한숨을 터뜨렸다. 이런 때는 신경 쓰는 사람이 손해였다.

“이만 갈까? 다들 기다리겠어.”

겸사겸사 돌린 화제였건만, 레이프는 어쩐 일인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그러자 레이프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했다.

“그게…. 원래 세계와 연결된 곳이 잡히지 않아. 아무래도 신과 연이 끊어지면서 돌아가는 길이 바뀐 모양이야. 계속해서 찾고 있는데 시간이 충분할지 모르겠어.”

레이프는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무너져 내리던 이 공간은 이제 성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괜찮아.”

하지만 이런 것은 조금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길이라면 바로 찾을 수 있어.”

“어떻게?”

나는 대답 대신 웃으며 아이템을 꺼냈다. 손바닥 크기만 한 나침반을 본 레이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곧 가늘게 늘어뜨렸다.

“…내 아가씨는 어디서 이런 걸 얻나 몰라.”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일부러 얼버무리며 대답하고는 레이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든 찾을 수 있는 나침반은 이미 우리가 갈 곳을 푸른 빛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레이프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한 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섬세하고 큰 손이 내 손을 맞잡았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제멋대로였던 심장이 이번만큼은 기분 좋게 쿵쿵 뛰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레이프.”

내게 고개를 돌리는 레이프의 모습이 시시각각 새겨졌다.

“좋아해.”

줄곧 외면했던 마음에 마침내 이름을 지어 주었다.

놀란 눈동자와 마주한 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왜 지금껏 그렇게 도망치려 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후련하면서도 동시에 몽글몽글한 감정이 충만했다.

“자, 그럼….”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예기치 못한 감촉과 온기가 입가에 닿은 탓이었다.

영원할 듯한 찰나가 지나고 레이프가 멀어졌다. 숨결이 얼굴을 간지럽힐 만한 거리에서 마주한 미소는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장에 무척이나 해로웠다.

“돌아가자.”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레이프가 나를 이끌었다.

우리는 푸른 빛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한때는 망한 게임이었던 세계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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