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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14)화 (114/122)

제114화. 19장. 망한 게임을 위한 솔루션 (7)

은밀하고도 감미로운 울림이었다.

그것도 무심코 듣게 된 사람들마저도 널브러지게 만들 만큼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부족할 만큼 황홀한 레이프의 한마디는 도리어 내 이성을 날카롭게 했다.

“내가….”

어금니를 악무는 것과 동시에 눈에 힘을 줬다.

그리고 빛처럼 빠르게 레이프의 등짝을 후려쳤다.

“만만하냐!”

찰진 마찰음이 하얀 장소를 가득 메웠다. 그 뒤로 이어지는 정적은 쏟아진 물처럼 차가웠다.

황망한 얼굴의 레이프와 너무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정신없이 깜박이는 시나리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뜨거운 이목에도 나는 굴하지 않았다.

“제발 상황 좀 봐 가면서 행동해! 하필이면 제일 중요할 때 분위기를 흐리면 어쩌자는 거야! 그런 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

“그럼 분위기만 맞으면 언제든 고백해도 괜찮다는 거네?”

“그래, 바로 그거…. 뭐?”

분위기에 휩쓸려 호기롭게 대답하던 나는 뒤늦게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고백…이라고?’

레이프는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눈꼬리를 사르르 접어 웃었다. 누구든 홀릴 듯한 미소였다.

“이것들이…!”

과부하가 온 머리가 좀처럼 사고를 하지 못할 때였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시나리오는 얼굴 가득 분노를 드러냈다.

“웃기지 마, 레이프 유클리드! 네가 느끼는 감정은 거짓이야!”

“왜? 사랑을 느끼는 대상이 아티야가 아니라서?”

깃털처럼 가벼운 물음 너머에는 잘 벼려진 검과 같은 날카로움이 감춰져 있었다.

“으윽…!”

신경질적으로 감정을 쏟아 내던 시나리오가 주춤했다.

그녀는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지 그저 혼란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보니 아직도 모르나 봐?”

시나리오의 얼굴에 스친 의문이 만족스러운지 레이프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배부른 포식자와 같은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먼저 이 세계의 이변을 깨달은 건 아티야가 아닌 나야.”

시나리오의 얼굴이 충격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라고…?”

뭐라고요?

중간에 깨달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든 납득해 보려 노력하는 가운데, 레이프가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정말 하나도 몰랐구나? 하긴, 알아챌 리가 없지.”

“그럴 리 없어! 내가 몇 번이고 확인했……!”

“맞아,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천족들을 보내거나 기존에 없었던 것들을 추가하곤 했지. 덕분에 상당히 애를 먹었지 뭐야? 특히나 뜬금없이 공원에서 오리배를 탔던 건 지금 생각해도 유치하고 별로였어.”

레이프의 설명이 능청스럽게 이어질수록 시나리오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맞다. 그런 것도 있었지, 참.’

지금껏 시나리오와 같은 심정으로 놀라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레이프의 손을 들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이벤트는 비슷한 호감도인 공략캐들이 서로 아티야와 오리배를 타겠다며 견제하는 내용이었는데, 장소가 저택에서 공원으로 뜬금포로 바뀌는 것이 특징이었다.

레이프를 공략하지 못해서 몰랐는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무리 시크릿 공략캐라도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불쌍해라…….’

처음으로 레이프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 해서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프의 성격상,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걸 알면 두고두고 놀릴 테니까.

‘보나 마나 자신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냐고 물어보겠지.’

그것만큼은 사양이었다.

결론을 내리자마자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

최대한 속을 들키지 않으려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머, 먹힐까?’

생각과 표정이 함께 가다 보니 조마조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세이딘.”

다행히도 유종의 미는 거둔 모양이었다.

레이프는 싱글거리던 미소를 싹 지운 채 진지하게 사과했다.

“널 속이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

“어….”

예상 이상의 레이프의 반응에 당황스럽고 낯설었다.

레이프가 얼마나 봉인을 풀길 바랐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어떻게든 날 붙들려고 하던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실은 그것 또한 반복되는 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기회를 노렸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지금껏 말을 하지 못한 이유가 단번에 납득이 갔다.

나만 해도 게임 속에 빙의했고 시스템창이 보인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설명은 나중에 하도록 할….”

“그럴 필요 없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고.”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해명할 필요는 없지.

레이프는 조금 놀란 표정을 하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세이딘. 좋아하게 된 게 너라서 다행이야.”

누가 공략 캐릭터가 아니랄까 봐 틈새만 보이면 훅 치고 들어왔다.

그 덕에 나는 뭐라고 반박할 새도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치겠네, 정말!’

가슴께를 맴도는 간질거림을 무시하며 저놈을 어떡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에 집중하려던 때였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시나리오의 외침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현실로 돌아왔다.

‘사, 살았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안도하는 나와 달리, 레이프는 불쾌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정말 눈치라곤 하나도 없네. 애초에 그런 게 있었으면 여기까지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뭐야, 방금 전 상황은 의도된 거였어?

그러나 레이프에게 물어볼 기회는 없었다.

“레이프 유클리드!”

“여기까지야.”

심해만큼이나 깊은 울림과 함께 시나리오가 주춤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온전해진 세계에 닿아 있었다.

일순이었음에도 레이프는 시나리오의 얼굴에 스친 두려움을 놓치지 않았다.

먹잇감을 목전에 둔 포식자처럼 번뜩이는 시선과 달리, 레이프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길게 말하지 않지. 이 이상 내게 관여하지 마.”

마지막 말처럼 찾아든 경고는 검날처럼 첨예했다.

“건방진…!”

그럼에도 시나리오는 그 말을 조금도 깊게 새기지 않았다.

“고작 세계 좀 회복시킨 걸로 기고만장해선 보이는 게 없나 보지!?”

분노를 터뜨린 시나리오가 팔을 들었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황금빛이 채찍처럼 길어지더니 변칙적으로 움직였다.

어떻게든 레이프를 해쳐 보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공격에 나는 단검을 꽉 쥐었다.

이미 몇 번이고 검증된 바가 있기에 저런 것쯤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어디를 베어야 할지 고민하던 때였다.

“세이딘, 몸을 숙여!”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그게 무슨 마…. 으아악!”

따지듯 터져 나온 질문은 별안간 몸이 뒤로 휘청거리는 바람에 이어질 수 없었다.

콰과과광!

간발의 차로 빛줄기가 내 머리가 있던 곳을 스치는 것과 동시에 살벌한 굉음이 귓가를 때렸다.

그제야 레이프가 외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미친 시나리오가….’

이성을 잃었는지 시나리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빛줄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괜찮아?”

반대로 된 시야에 레이프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으응, 좀 놀란 것 빼고는 괜찮아.”

떨떠름한 대답에 레이프의 눈동자가 탁한 빛을 띠었다.

그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세이딘, 물러나 있을래?”

“뭐?”

“네게 단검이 있다는 건 알아. 그리고 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데 물러나 있으라고?”

“신과 종지부를 찍고 싶어.”

나직하고 담백한 연유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을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아티야보다도 훨씬 전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다면 악연을 끝낼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을 테니까.

“그래,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뭐라고 하겠어?

“대신 안 되겠다 싶으면 나설 거야.”

“이해해 줘서 고마워.”

상큼하게 웃은 레이프는 곧바로 나를 일으켜 제 등 뒤에 감추었다.

마침 시나리오의 공격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각오해라!”

번뜩이는 눈동자가 무색하리만치 심각하게 상투적인 외침이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공격에도 레이프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그저 황금빛을 향해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날카롭게 날아들던 황금빛이 모래처럼 잘게 아스러졌다.

걱정한 것이 허탈해지는 결과였다.

“고작 이게 다야?”

정적 속에서 레이프가 물음을 던졌다. 시나리오를 도발하기 위해 일부러 ‘고작’에 힘을 준 것이 돋보였다.

경악에 허우적대던 시나리오는 덫에 보기 좋게 걸려들어 눈을 번뜩였다.

“어쩔 수 없지.”

시나리오의 몸에서 황금빛의 스파크가 일었다.

“그렇게 소멸하길 바란다면야.”

번쩍거리던 스파크들은 어느덧 새카만 연기가 되어 하얀 공간을 게걸스럽게 삼켜 갔다.

“온전히 영향에서 벗어난 게 아니었나…?”

이쪽까지 가까워진 연기에 레이프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조금도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저건…, 페널티잖아?’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은 이 세계의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온몸을 덮쳤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레이프는 까만 연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마른 웃음을 흘렸다.

“하하, 한 방 먹었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안 돼,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끝내지 않은 채로 돌아갈 수는 없어.”

“뭐…?”

단호한 내 말에 레이프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세이딘, 단검으로 이 연기를 다 없앨 수는 없어.”

나는 레이프의 설득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품을 뒤적였다.

얼마 가지 않아 꾸깃거리는 티켓이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몰라 갖고 있었던 페널티 무효권이었다.

“세이딘, 이건…?”

혼란스러워하는 레이프를 향해 씨익 웃었다.

“네 목숨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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