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19장. 망한 게임을 위한 솔루션 (6)
“그게 무슨….”
시나리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동요로 가득한 목소리는 의문과 당혹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못 알아들었어?”
다시금 시나리오의 뒤통수를 쳤다는 쾌감을 뒤로하며 한 단어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
“너한텐 어떤 것도 받기 싫단 뜻이야.”
“뭐…!”
시나리오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곧장 몸을 숙여 바닥에 단검을 그었다.
종이를 자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무결하고 새하얀 바닥에 금이 생겼다.
단검의 길이 정도밖에 되지 않던 금은 조금씩 길이를 더해 가며 균열이 되었다.
“너…!”
이미 평정심이 무너진 시나리오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렸다.
가슴이 뻥 뚫리는 뿌듯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허공을 향해서도 단검을 휘저었다.
“안 돼!!!”
시나리오의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단검이 움직였다.
날붙이의 궤적을 따라 하얀 공간에 새카맣고 날카로운 흔적이 길게 새겨졌다.
‘이것도 되네?’
아무리 단검의 효능이 뛰어나도 대상이 멀리 있으면 효과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은 이름 그대로 바라기만 하면 무엇이든 숭덩숭덩 잘라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써 볼걸!’
아쉬움도 잠시, 다시금 고개를 쳐든 생각을 도닥였다.
지난 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니 이제부터라도 단물까지 알차게 다 빼먹을 생각이었다.
“그만해!”
얼마나 베어야 이 공간이 무너질지 고민할 때였다.
하얗게 질린 시나리오가 어깨와 가슴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무시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나는 멈칫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어느새 주먹만 한 구체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짙은 파란색과 다양한 녹색,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황토빛이 어우러진 그것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지구……?”
“다행히 눈썰미는 나쁘지 않은 모양이네. 아쉽게도 네가 살던 곳은 아냐. 다른 ‘세계’지.”
“세계…라고?”
“그래, 세계.”
내 물음을 따라 대답한 시나리오는 더 이상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설마…?’
쿵쿵 뛰는 가슴에 불안이 엄습했다.
녹아내릴 듯한 시나리오의 미소와 마주치자, 예감은 확신이 되어 만연했던 자신감을 거품처럼 흩어 놓았다.
지구를 닮은 구는 다름 아닌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의 세계였다.
턱을 살짝 치켜든 시나리오가 거만하게 말했다.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을 휘두르는 건 그만둬. 그러지 않으면 이 게임을 무너뜨릴 테니까.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고 싶은 건 아니겠지?”
“이 게임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어?”
“당연하지.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은 내가 만든 게임 중에서도 이렇게까지 생기 있는 게임은 없었어. 그 덕에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이 많이 생겨서 많은 힘이 됐고.”
과거를 회상하는 시나리오의 시선은 아득했다.
황금빛 눈동자 위로 무수한 감정이 스치는가 싶더니 환상처럼 사라져 버렸다.
현실로 돌아온 시나리오가 말했다.
“하지만 너 따위에게 놀아날 바에야 부숴 버리는 게 나아. 여러모로 타격은 크겠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회복할 수 있어. 새로워진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은 전보다 훨씬 완벽해져서 더 많은 플레이어를 끌어들일 테니까!”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았지만, 결국엔 내가 갖지 못하면 남도 가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너무 뻔해서 놀랍지도 않아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너는 다르지, 세이딘 그웨니르.”
느닷없이 내게 화살을 돌린 시나리오는 입가를 비틀어 미소 지었다.
“이 게임이 사라지면 이방인인 넌 수많은 게임들의 주위를 영원히 배회하게 될 거야. 아무리 원하고 원해도 내 허가가 있기 전까지는 절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어.”
“그러든가.”
“좋아, 얼마든지 그렇게……. 뭐라고?”
“그렇게 하라고.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휘둥그레진 시나리오의 눈동자 위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려다보던 시나리오의 시선은 어느새 한참 밑에 자리했다.
침묵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감정이 스쳐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리 놀라? 아니면 내가 또 속을 줄 알았어?”
시나리오는 벌써 여러 차례 나를 속였다.
지금껏 맥없이 당했던 것은 대적할 만한 힘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신은 더 이상 나를 어떤 식으로든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었다.
<바이올린과 꽃미남들>의 세계를 무너뜨리겠다는 것도 얼핏 듣기엔 협박 같지만, 바꿔 말하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내가 두렵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세계를 무너뜨리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팍팍하고 암담했던 원래 세계와 달리, 이 세계는 내게 있어 꿈과 희망이었다.
데스티니를 잡은 순간부터는 매 순간이 롤러코스터였고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렇다 해서 멸망을 바란 적은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맡게 되었나 몰라.’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하, 웃어?”
내 표정을 멋대로 오해한 시나리오가 바르르 떨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수치와 분노로 가득했다.
“그래, 좋아!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시나리오는 지구를 닮은 구를 향해 힘을 주었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아지랑이 같은 황금빛이 세계를 덮었다.
흡수된 빛은 작은 금이 되어 구체의 곳곳에 뒤덮였다.
‘막아야 해!’
생각과 함께 단검을 휘두르려던 순간이었다.
“내 아가씨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귓가에 스며든 부드러운 대답에 사고가 정지했다.
그것은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있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본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수정만큼이나 짙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새하얀 풍경을 압도했다.
“레이……프?”
겨우 던진 물음에 마주친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며 달처럼 휘어졌다.
원래부터 현실감 없는 사람이었지만 장소와 상황이 더해지니 더욱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진짜야…?”
“네가 보고 싶어서 달려왔어, 세이딘.”
준비할 새 없이 날아든 말은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쏘아붙였다.
“그렇게 웃으면서 얼버무리지 마!”
“너무해라, 내가 언제 너와 관련한 일에서 얼버무린 적이 있던가?”
레이프는 이런 상황에서도 가감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여길…! 죽었던 게 아니었어?”
한편 시나리오는 나만큼이나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관심 가득한 미소를 짓던 레이프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뭘 그렇게 놀라? 전설의 대마법사라는 ‘설정’을 부여한 건 너면서.”
“하지만 그러기엔 봉인이……. 설마?”
서늘한 눈으로 시나리오를 바라보던 레이프는 입가를 길게 늘어뜨렸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앞에 두고도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봉인이…, 풀렸구나.”
“그래. 그 덕에 이렇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웃기지 마! 여긴 네가 있던 세계와 전혀 다른 장소야. 그런데 고작 캐릭터일 뿐인 네가 이곳을 찾아왔다고?”
나는 서슴없이 말하는 시나리오에게 놀라면서도 동시에 무척이나 초조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장소를 언급한 것도 모자라 레이프에게 ‘캐릭터’라고 표현한 것이 그 증거였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증거를 보여 줘야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레이프도 마찬가지였다.
시나리오의 거센 부정을 지켜보던 그는 더욱 짙은 미소를 띠고는 제 손을 폈다.
푸른 새싹을 닮은 연둣빛이 개화하는 꽃처럼 구체를 피워 냈다.
그것은 옅은 금이 간 지구를 닮은 구체였다.
‘설마…!’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시나리오의 손에 있어야 할 구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떠다니는 와중에 눈이 마주친 레이프가 산뜻한 윙크를 보냈다.
덕분에 잊고 있던 흑역사가 고개를 쳐드는 바람에 혼란이 배가 되었다.
“거짓말…….”
절망과 상실로 가득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시나리오의 심정은 내 마음을 떼다 붙여 놓은 것처럼 똑같았다.
시나리오는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했지만 레이프가 그 모습을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는 빈손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여기저기 금 간 곳들이 메워지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게……, 가능하다고?’
레이프가 엄청난 먼치킨이라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애초에 ‘시크릿 공략캐’라는 타이틀이 붙을 정도니 말 다 했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간 거 아냐?’
비현실적인 가운데 자아를 드러낸 이성은 쉽사리 떨쳐 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받아들여 보려고 하는데 레이프가 김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렇게 믿기 어려워?”
“으응?!”
퍼뜩 놀라 바라보자 레이프는 말없이 제 얼굴을 톡톡 쳤다.
“표정, 다 드러나.”
“…….”
하, 여기서 나가기만 해 봐라. 무조건 연기 배운다.
레이프는 내가 다짐을 불태우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신에게 봉인당한 내가 우리가 살던 세계를 빼돌린 데다 회복까지 시켰으니까.”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궁금한 부분들만 짚어 내는 걸까?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레이프의 말을 기다렸다.
시나리오 또한 경계하면서도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심 속에서도 레이프는 오로지 나만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야.”
봄볕처럼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제정신인가?’
여기서 분위기를 잡는다고?
이렇게나 정신이 또렷한데도 불구하고 입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계속 이런 상태다.
레이프가 말을 하면 몸과 마음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이 술렁이는 가운데, 레이프는 작게 숨을 들이켜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미려한 입술이 머뭇거림을 뒤로하고 달싹였다.
“사랑의 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