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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이올린을 켜지 마세요 (112)화 (112/122)

제112화. 19장. 망한 게임을 위한 솔루션 (5)

“뭐…?”

신은 황당하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경계와 두려움으로 가득하던 시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지금껏 보고 듣고도 모르겠어? 난 신이야.”

나는 대답 대신 애잔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자, 견디지 못한 신은 목소리를 높였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네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지 그러니?

나는 이번에도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좀 전과 다른 것이라곤 안쓰러워하는 대신, 한심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신은 결국 우기기를 포기했다.

“도대체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눈치챈 거야?”

콕 집어서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신이 보인 태도와 상황들 속에서 간간이 보이던 모순이 거슬렸고, 그것들을 기반으로 의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넙죽 물어 줄 줄이야…….’

나는 대답을 열망하는 신을 향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박였다.

“글쎄, 언제부터일까?”

“익…!”

떠보기에 실패한 신은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은 어떻게든 한 가지라도 건져 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일부러 활짝 웃었다. 모처럼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이상, 쉽사리 내줄 마음은 없었다.

깊은 한숨을 토해 낸 신은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히더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야기꾼’이야.”

“이야기꾼…?”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대답을 듣자마자 나는 눈을 가늘게 늘어뜨렸다.

아무리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노골적으로 성의 없게 답하면 어쩌자는 거야?

가감 없이 비난 어린 시선을 보내자, 신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나를 향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너 말이야, 생각 좀 안 드러나게 할 수 없어? 그래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어쩌다가 적에게 이런 설교를 듣고 있는 건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빈곤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안 그래도 연기를 배우려고 하는 중이야.”

돌아오는 한심하다는 듯한 반응에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꾼’이라는 게 뭔데?”

“세상에, 여기까지 알았으면 이 정도는 바로 눈치채야지 뭐 하는 거야?”

방금 전까지 내 말에 쩔쩔매던 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뻔뻔하게 굴었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어처구니없는 것도 잠시, 작은 한숨을 폭 내쉰 그녀는 다채로운 표정을 감추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주위에 흐르는 공기가 단숨에 결을 달리했다.

“나는 게임을 만든 모든 자들의 의지이자 게임의 시나리오야. 그래서 ‘이야기꾼’이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착각과 함께 ‘시나리오’가 스스로에 대해 드러냈다.

귀에 꽂힌 말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녀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게임 속의 이야기들은 다 내 손을 거쳐 시작되고 끝을 맺고 반복해. 네가 즐겨 하던 이 <바이올린과 꽃미남들>도 내가 만든 무수한 이야기 중 하나고.”

머리가 시나리오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지만 그렇다 해서 그렇게 놀랍거나 충격적이진 않았다. 어쩌면 이 사실에 대해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혼잣말에 가까운 깨달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서 신이라고 한 거구나.”

“시나리오에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거든. 엑스트라인 널 데스티니와 엮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런 것치고는 나한테 절절매는 것 같은데.”

무표정했던 시나리오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빠르게 스쳤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달리, 시나리오는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가늠하고 헤아리듯 먼 시선을 하다가 한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그래,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어.”

“아까도 말했지만 애초에 아티야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될 일은 없었어.”

“…그거랑 이건 달라.”

“아니, 같아.”

나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시나리오가 나를 해칠 수 없다는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스스로를 ‘이야기꾼’이라 지칭한 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이런 것까지 설명할 날이 올 줄이야…….”

아까처럼 화를 낼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체념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시나리오는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아티야에게는 레이프의 봉인을 풀기 위해 희생되었다는 설정까지만 부여했지 반복되는 시간들까지 기억하도록 하진 않았어. 그러니 그 아이가 원인이라 보기는 어려워.”

“그게 무슨…….”

“아티야는 버그에 걸렸어.”

무언가 머리를 세게 후려치는 느낌이었다.

호감도와 이벤트에 휘둘리는 일상을 보내온 덕에 이 세계가 게임이라는 걸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시나리오는 놀라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나를 힐끗 보고는 이야기들을 이어 갔다.

“주인공이 버그인 경우는 드물지만, 너도 알다시피 게임에 버그가 존재하는 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 오히려 신선했지. 내가 누군지 명확히 알고 기억하는 건 아티야가 유일했거든.”

시나리오는 까마득하게 많은 게임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기억하는 아티야에게 신선함과 강한 애착을 느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돕는,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는 천족이라 불리는 에이브가 그녀의 일탈을 허락해 달라 요청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전말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가운데에서도 시나리오는 멈추지 않았다.

“별것 아닌 일이었어. 딱 한 번, 게임의 주인공을 아티야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설정해서 엔딩까지 흘러가도록 두면 그만이었지.”

그래, 안 그래도 궁금한 게 그거였어.

“…왜 나야?”

아슬아슬 쥐어짠 목소리가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마침 고민하고 있을 때 보인 게 너였어.”

줄곧 의문이었던 그것은 생각보다 별것 아닌 이유였다.

모든 세상이 아득해지는 감각 속에서도 시나리오는 쉬지 않고 이유를 늘어놓았다.

“게다가 이방인인 너라면 버그에 걸릴 위험도 없으니 제격이었지.”

“고작 그런 이유로…….”

“네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게임에 버그가 생기면 얼마나 골치 아픈지 알아?”

“그럼 버그를 없애면 되잖아. 아티야는 왜 내버려 둔 건데?”

“아까도 말했잖아. 신선했다고. 그리고 예쁘고 귀엽지.”

“…….”

“애초에 버그가 심했다면 아티야를 그대로 두지 않았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그 아이가 아니라 너였어.”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저 기적의 논리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지켜볼 셈이었다.

한결같이 나를 문제로 지적한 시나리오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세이딘 그웨니르, 네가 아티야의 대역을 제대로 했더라면 레이프를 비롯한 공략캐들이 너에게 지금만큼 관심을 두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아티야도 휴식 이상을 바라지 않았을 거고. 그뿐이야? 네가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안락한 생활과 욜로도 얻어 낼 수 있었어.”

폭포처럼 쏟아진 비난에 절로 한쪽 입가가 올라갔다.

이쯤 들었으면 충분했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내게 말하지 않았는데?”

“…뭐?”

“그렇잖아, 잠깐 아티야의 대역을 시킬 생각이었으면 사전에 도움을 요청하고 허락을 구했으면 될 텐데 그러지 않았잖아.”

“싫다고 할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치?”

짧은 대답과 함께 시나리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져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가 한 말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알면서도 어떻게든 내 탓을 하려는 필사적인 모습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대놓고 기분을 드러냈다간 지금껏 잡아 온 주도권을 뺏길 수도 있기에 슬금슬금 시나리오의 속을 긁어 도발할 생각이었다.

“이해해, 항상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배치하던 네가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테니까. 그리고 일이 틀어져도 상대가 만만하니 탓하기도 편하고, 생색내며 자비를 베푸는 척하며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데 굳이 부탁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안 그래?”

나는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던 시나리오는 갈수록 낯빛이 어두워졌다.

서늘한 시선과 함께 낮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 아닌 다른 인간을 사용할 걸 그랬어. 그랬다면 모두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세계에 대해 모른 채로 살았을 거야.”

“으음,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아냐!!”

평정심이 흐트러진 시나리오는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모든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어.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정적 속에서 어깨를 들썩이던 시나리오가 입을 열었다.

“결국 세이딘 그웨니르, 넌 내 말을 따를 생각이 없는 거야?”

“정확해.”

이 이상 이야기를 해 봐야 무의미하니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였다.

나는 시스템창에서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을 꺼냈다.

단검을 알아본 시나리오의 얼굴에 경악이 스치는가 싶더니 분노로 뒤덮였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너 때문에 창창한 미래를 버리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욜로를 주겠다 해도?”

비장함이 흐르는 시나리오의 태도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바라도 들어주지 않다가 날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인제 와서 손바닥 뒤집듯 태세 전환을 하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필요 없어.”

나는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단검을 꽉 쥐며 웃었다.

“내가 스스로 거머쥐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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