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19장. 망한 게임을 위한 솔루션 (4)
“세이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레이프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둘러 잡아 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폭발적으로 제 몸을 부풀린 빛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험악한 기세의 빛에 휩싸였다.
“세이딘!”
나만을 쫓던 호박색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찬란한 빛과 정적에 잠겨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아,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어.”
완벽한 침묵만 가득하던 귓가에 속살거림이 찾아들었다.
“이러면 방해 없이 느긋하게 대화할 수 있잖아.”
말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빛의 영향으로 인해 눈꺼풀을 몇 번 깜박이고 나서야 시야가 또렷해졌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끝도 없이 펼쳐진 새하얀 풍경이었다.
낯선 장소가 그리 당황스럽지 않게 여겨지는 건 어쩌면 이 상황을 예상해서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생각해, 세이딘 그웨니르?”
느닷없이 날아든 물음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늘도, 땅도, 어떤 구분도 없이 그저 하얀 세계의 한가운데에 높이 선 붉은 보좌가 있었다.
화려한 세공으로 뒤덮인 자리에 앉은 신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웠던 그녀는 해방감으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한테 유리한 곳으로 데리고 왔나 보네.’
그 모습이 맘에 들지 않은 나머지 나는 입가를 삐뚜름하게 끌어 올리며 대꾸했다.
“멋대로 데리고 와 놓고 인제 와서 내 의견이 무슨 의미가 있어?”
“눈치 없긴, 당연히 예의상 물어본 거지. 그런 것도 몰라?”
“…….”
아니, 저기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이보다 더 세계가 붕괴되길 원하진 않을 거 아냐.”
황당했던 것도 잠시,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스쳤다.
세계와 붕괴. 흘려듣기에는 너무도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정색하며 말하자 신은 입가를 길게 늘어뜨렸다.
“이제 좀 대화할 마음이 생기나 봐?”
“내가 먼저 질문했어. 그리고 그건 대답 여하에 따라 다르고.”
흡족함으로 가득했던 신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너 되게 재미없는 거 알아, 세이딘 그웨니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다고 귀염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새삼스러울 건 아니지.
“레이프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널 좋아하게 된 걸까? 아티야보다 매력적이지도 않은데.”
그러게? 나도 좀 의문이긴 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내가 아니라 당사자한테 물어보는 게 어때?”
종달새처럼 조잘대던 신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어떻게든 도발시키려고 하는데 넘어오기는커녕 조언을 받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하, 됐어. 말을 꺼낸 내가 잘못이지.”
나를 요모조모 살펴보던 신은 결국 한숨을 내쉬더니 더는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말 그대로야. 이 세계는 배역을 비롯해 시작과 끝이 정해진 ‘게임’인데 어느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어. 다름 아닌 세이딘 그웨니르, 너 때문에.”
가슴이 저 밑바닥까지 처박혔다 떠올랐다.
게임 속을 하나의 세계로 받아들이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내게는 신의 쐐기가 매몰차기만 했다.
‘정신 차려, 세이딘 그웨니르.’
그럼에도 아득해지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상황을 파악했다.
신에게 있어 세계의 붕괴는 자신이 지정한 시간에 배치한 인물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지 않고 이탈하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그게 내 탓이라고?’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이어 나가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조금씩 커진 웃음소리가 거슬렸는지 신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는 한층 더 커지려는 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웃지 않고 배기겠어? 다섯 살짜리 애도 이런 억지는 안 부리겠다.”
“곱게 말하니 못 알아듣나 본….”
“아티야는 모든 일을 기억하잖아.”
신의 말끝을 자른 내 목소리는 단호했다.
휘둥그레 뜬 황금빛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말한 ‘붕괴’는 아티야가 시간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어.”
만약 아티야가 이 세계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자신의 배역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을 터였다.
그랬다면 나라는 대역을 세울 생각도 안 했을 거고, 나 또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 세계 속에서 살아갔겠지.
신은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바르르 떨었다.
무척이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까지 겪어 본 바가 있다 보니 마음이 약해지지는 않았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어때? 그렇게 청승 떨려고 장소를 옮긴 건 아닐 거 아냐.”
“…독한 여자 같으니라고.”
그대로 반사다, 이놈아.
쌍으로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싶은 충동을 꾹 눌렀다. 피해 의식도 정도껏 부려야지 대체 왜 저런담?
불만을 드러내는 것도 잠시, 고민 끝에 신은 다채로웠던 표정을 감추고 입을 열었다.
“이 이상 이 세계에 관여하지 마, 세이딘 그웨니르.”
순간 황당함에 말문이 턱 막혔다.
나를 아티야 대신으로 세워 놓은 것은 신이었다.
‘인제 와서 저런 말을 하는 건….’
물처럼 흐르는 의식 속에서 지금껏 생각해 본 적 없는 또 다른 가능성이 번뜩이며 찾아들었다.
신은 나를 해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게 어떤 제약도 줄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날 이런 곳에 데려와 회유를 할 필요가 없었다.
한편 신은 이런 내 추론에 수긍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네가 이 세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좀먹고 있더라고? 그래서는 안 되거든. 이 세계는 레이프와 아티야의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온전해.”
상상을 초월하는 모순된 주장에 놀라는 나와 달리, 신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평온했다.
“이 세계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면 네가 바라던 대로 평온한 일상과 욜로를 약속할게.”
그런 내 모습이 긍정하는 것으로 비쳤는지,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회심에 찬 표정으로 조건을 내걸었다.
‘…와, 실화냐?’
목구멍과 가슴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이전이라면 신나서 넙죽 받아들였겠지만 이미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겪은 바가 있는 이상, 신의 말은 그저 속 빈 강정일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기는 감각을 느끼며 한숨 섞인 진심을 토해 냈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 진짜 멍청하구나?”
“뭐…라고?”
“그렇잖아, 세상에 누가 한 번 속았던 조건을 또다시 걸어? 이런 경우는 보통 둘 중 하나가 바보란 건데, 나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니 남은 건……. 말 안 해도 알지?”
도자기같이 하얀 신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허물어진 무표정 너머로 드러난 것은 짙은 분노였다.
“감히…. 불쌍한 마음에 기회를 주려 했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는구나!”
기회요? 무슨 기회?
신이 한 거라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거짓말하고, 그게 잘되지 않아 화풀이를 한 것밖에 없었다.
‘양심이 가출해도 단단히 가출했네.’
속으로 혀를 끌끌 찬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찔림도 없는 신은 오롯이 나를 향해 분노를 드러냈다.
태풍처럼 들이닥친 위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예상치 못한 일투성이였지만 지금 이 상황만큼은 의도한 바였다.
나는 확신이 필요했다. 아무리 그럴듯한 가능성이어도 결과가 없으면 두려움을 안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이 확실해지면 내가 가진 두려움은 고스란히 신에게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속으로 심호흡을 하는 것과 함께 다짐을 다진 후 신을 향해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신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도발이 되었다.
“이…!”
신의 몸이 황금빛에 감싸이는가 싶더니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졌다.
‘아이템창!’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페널티 무효권을 찾아서는 손에 꽉 쥐었다.
만에 하나라도 신의 공격이 내게 해를 입히려 한다면 이것이 내 동아줄이 되어 줄 것이었다.
부디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의 몸에서 흩어진 빛은 눈이 멀 정도로 눈부실 뿐, 어떤 통증도 유발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세상에 만연했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이럴 수가…….”
떨림으로 가득한 신의 중얼거림이 귓가를 스쳤다.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눈꺼풀을 들었다. 빛으로 인해 까맣게 보이던 시야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다.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마지막으로 페널티 무효권을 확인했다.
‘페널티 무효권은…. 그대로네.’
티켓의 형태를 띤 그것은 이리저리 구겨진 것 외에는 멀쩡했다.
이로써 가능성은 확신이 되었다.
신은 나를 해칠 수 없다.
“어떻게… 무사한 거지?”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 않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내 반박에 경악으로 가득했던 신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스쳤다.
“…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느닷없는 질문에 다소 난감해졌다.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물어본다면 내가 아는 것은 지금까지 겪어 온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추측한 것들을 묻는 것이라면 대답은 완전히 달라졌다.
‘어차피 한번 떠볼 생각이었는데 잘됐어.’
하도 굴러서 그런지 기회가 왔으면 일단 잡고 보자는 마음이었다.
“일개 엑스트라가 아는 게 얼마나 되겠어? 그래도 굳이 말한다면….”
나는 살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당신이 신이 아니라는 것 정도?”
부디 이 미소가 신을 흔드는 데 한몫하기를 바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