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19장. 망한 게임을 위한 솔루션 (3)
공략캐들의 다채로운 구애에 익숙해졌으니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으아, 내 항마력!’
모처럼 다져 둔 긴장이 거품처럼 허망하게 쓸려 나갔다.
그러나 현실은 손발이 실종될 것 같은 나를 두고 착실하게 흘러갔다. 신의 명령을 따라 레이프가 한 걸음씩 가까워졌다.
‘난감하네.’
레이프의 봉인은 이미 한참 전에 풀렸다. 그렇다는 것은 날 노릴 레이프의 힘에 어떤 제약도 없다는 뜻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오글거림에 집을 나갔던 긴박감이 다시 찾아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귓가를 때리는 것도 모자라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니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도발을 좀 다르게 할 걸 그랬나?’
걱정이 스치기가 무섭게 곧바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정신 차려, 세이딘 그웨니르.’
신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했다.
물론 레이프를 이용해 날 없애려고 할 줄은 몰랐지만 어찌 됐건 움직이게 했으니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다가올 때를 기다리고 기회를 잡는 것이었다.
‘그러니 먼저 공격해야 해.’
심호흡과 함께 생각을 다진 뒤 곧장 마법 시동어를 외쳤다.
“아이스 애로우!”
새벽의 망토는 떨림으로 가득한 목소리에도 제대로 응했다.
사방에 떠오른 뾰족한 얼음 덩어리가 레이프를 향해 날아갔다.
망설일 새는 없었다. 자칫하다 위험해지는 것은 레이프가 아닌 나였으니까.
게다가 새벽의 망토의 위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시간 제한이 있는 이상, 빠르게 승부를 보는 것이 나았다.
“소용없어.”
낮게 깔린 신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햇빛처럼 눈부신 미소와 달리,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고대의 대마법사라 불리는 자가 그깟 얼음 덩어리에 밀릴 리가 없잖아?”
‘그 정도쯤은 나도 알고 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레이프에게 날아간 마법은 조금도 닿지 않았다. 그의 몸에 얇게 쳐진 방어막 때문이었다.
레이프는 내 공격들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내 마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얼음 화살들이 허공에 즐비하게 늘어섰다.
마치 이게 마법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광경에 복잡한 기분이 찾아오려던 것도 잠시, 레이프의 손짓을 따라 유성우처럼 떨어지는 공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 실드!”
얼음 화살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쯤 얇은 은빛 막이 내 전신을 덮었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살벌한 마법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원래 세계에서 판타지류 책과 게임을 많이 접해 둬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마법을 이렇게 즉각적으로 쓰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공격을 받아 내느라 정신없는 사이, 레이프는 꾸준히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대로라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좀 더 발악하도록 해, 세이딘 그웨니르! 그래서야 레이프를 이길 수 있겠어?”
‘웃기고 있네, 정말. 지켜보는 주제에 무슨 말이 저렇게 많아?’
애초에 내 목적은 레이프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란 말이야.
속으로 불만을 중얼거리며 이어서 떠올린 불 마법을 외쳤다.
“파이어 볼!”
아기 머리통만 한 수십 개의 불덩어리가 레이프에게 날아갔다. 당연하게도 이 수많은 공격은 그의 머리털 한 올도 태우지 못했다.
그렇다 해서 멈출 수는 없었기에 그 후로도 끊임없이 아는 마법 주문을 죄다 읊었다.
“윈드….”
기세를 몰아 마법을 사용하던 중, 휘몰아치며 밀려오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새벽의 망토의 제한 시간이 다 된 것이다.
“하필이면 지금….”
낭패감을 느낄 새도 없이 레이프가 지척에 섰다. 장난스럽게 빛나던 호박색 눈동자는 그랬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탁했다.
“후, 후후후….”
한 걸음만 내디디면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레이프와 나를 본 신은 웃음을 흘렸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웃음은 승리감에 취해 점점 소리를 더해 갔다.
“아하하! 참으려 했는데 더는 못 참겠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사랑하는 이에게 공격받는 대마법사와 앞으로 그에게 죽을 예정인 그의 연인이라니! 하하하하!”
어떻게든 무시하고 짓누르려는 의도가 명백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얄팍한 수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시동 걸린 본능이 망설임 없이 질주했다.
“난 레이프의 연인이 아냐.”
단호한 내 말에 유쾌하게 퍼져 가던 웃음소리가 단번에 끊겼다.
“역시 저 여자는 돌았어.”
지금까지 찍소리도 못 하던 에이브가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고,
“세이딘….”
거리를 둔 아티야는 거리낌 없이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쏟아지는 반응이 조금 머쓱하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하…. 세이딘 그웨니르.”
짙은 한숨 섞인 목소리에 나는 똑바로 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잔뜩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널 온전히 없애는 거지. 아, 덤으로 정신을 차린 레이프가 이 상황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기대되고 말이야.”
말을 끝맺은 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해맑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쫓아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배부른 사자처럼 느긋했던 신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어렸다.
“왜 웃어? 상황 파악이 안 돼?”
쉴 틈 없이 이어진 물음에도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줄곧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집요하게 쫓아오는 신의 시선을 뒤로하고 레이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레이프?”
그런 나를 보며 신은 조롱 가득한 웃음을 흘렸다.
“하! 소용없어. 레이프에게 네 목소리는 들리지 않….”
“기왕이면 이런 때는 연인이라고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나직하고 장난스러운 대꾸를 들은 신이 얼굴을 굳혔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에이브와 아티야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레이프를 봤다.
모든 이목이 쏠린 상황 속에서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집중할 뿐이었다.
어이없는 시선을 고스란히 보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넌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적어도 내 아가씨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거든?”
“나도야.”
레이프의 유려한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심장이 부산스럽게 덜그럭거리는 것과 동시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목에 턱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다친 덴 없어, 세이딘?”
내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사이, 레이프는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어찌나 재빠른지 내 손은 어느새 그에게 잡힌 채였다.
‘가까워, 가깝다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머리를 따라 눈이 어지러워져서 본능적으로 레이프를 밀쳐 냈다.
놀란 듯한 레이프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곧 두 손을 들었다. 어느새 예쁘게 접힌 눈가는 짓궂은 빛이 가득했다.
“알았어, 떨어질게. 이 정도면 됐지?”
“더 떨어져!”
“정신이…. 아니, 그보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충격으로 가득한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이프에게 휘둘리느라 잠시 신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나와 레이프를 바라보는 신은 좀처럼 믿을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제야 내게서 시선을 거둔 레이프는 신을 향해 화려한 미소를 피워 냈다.
“놀라는 척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잖아?”
“설마… 봉인이?”
레이프는 대답 대신 짙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은 신뿐만이 아니었다.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듯한 아티야와 달리, 에이브는 정색하며 반발했다.
“말도 안 돼! 세이딘 그웨니르는 널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너와 그런 것까지 해명해야 하는 사이던가?”
밝은 미성이 가라앉으며 주위의 공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레이프의 위압감에 짓눌린 에이브는 금세 흙빛으로 질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멍청하긴.’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에이브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이 얼마나 답 없고 무서운지 느껴졌다.
“하….”
허탈함을 담은 어린 한숨 소리가 깊었다.
“감히 날 속인 것도 모자라 내 앞에서 사랑놀음을 벌여?”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신은 레이프와 내가 서로 사랑해서 봉인이 풀렸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사실 내가 치트키를 갖고 있거든요.’
입이 근질거렸지만 지금은 밝힐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아쉬움은 신의 속이나 박박 긁으며 달래는 수밖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그렇게 기분 나빠해? 아티야를 대신하라 할 때는 언제고.”
“시끄러워! 그리고 네게 허락한 건 떨거지들이지 레이프 유클리드가 아냐!”
“대체 무슨 논리야….”
공략캐들을 말이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저거.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신이 생각 이상으로 과하게 반응한다는 점이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가운데, 누군가 가볍게 어깨를 도닥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세이딘. 저 작자가 언제 생각이라는 걸 한 적이 있어?”
레이프는 상큼한 미소로 숨 쉬듯 자연스럽게 신을 깎아내렸다.
그래, 봉인당한 것도 억울한데 계속 시간을 반복하면서 보냈으니 얼마나 쌓인 게 많겠어.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었을 테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신경 안 썼어. 단지 어이가 없을 뿐이지.”
그 순간이었다.
찬란한 황금빛이 나와 레이프를 향해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