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19장. 망한 게임을 위한 솔루션 (2)
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는 내 손을 잡은 채로 눈을 감은 레이프가 있었다.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조롱이 이어졌다.
“불쌍하지 않아? 그렇게 봉인을 풀고 싶어 하더니 결국은 사랑에 매여서 봉인은커녕,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신세가 됐잖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라….’
아무래도 신은 레이프가 완전히 봉인이 풀린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듣던 중 다행이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모처럼 세운 계획의 노선이 다소 복잡해졌을 테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신을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분노로 번뜩이던 황금빛 눈동자는 어느새 별무리를 머금은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러는 걸 보면 신이 아니라 애 같네.’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전혀 달랐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분명 믿을 구석이 생겨서겠지.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느닷없이 떠오른 시스템창의 응원에 헛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자아를 드러내기 시작한 시스템은 종종 저런 식으로 응원 비슷한 것을 뱉어 냈다.
‘말은 누가 못 해요.’
속으로 시스템창을 비아냥거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ㅠㅠㅠㅠ’가 끊임없이 쏟아졌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짜게 식어 갈 뿐이었다.
‘자업자득이지, 지금까지 신나게 사람을 굴릴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돕는 척을 하고 있어?’
신은 시스템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한참 나를 보다가 못다 한 말을 이어 갔다.
“이런 거 보면 너도 참 대단해, 세이딘 그웨니르. 너 하나 편하기 위해 구애하던 자를 희생시키다니 말이야.”
노래처럼 이어지는 들뜬 목소리와 사르르 휘어진 눈동자에는 조롱과 비난으로 가득했다.
‘저러고도 신인가?’
의식을 따라 떠오른 질문은 곧 조소로 바뀌었다.
‘아니지, 밑바닥까지 본 마당에 뭘 기대하겠어?’
거기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쓰러뜨릴 예정인 상대인데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할까.
나는 작은 심호흡을 뱉어 낸 뒤, 신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지막 이벤트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할 말은 그게 끝이야?”
“뭐?”
“내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유도한 거 말이야. 그런데 어쩌지? 레이프는 숨을 쉬고, 난 그에게 어떤 희생도 요구한 적 없는데.”
잔뜩 들뜬 아이처럼 생기로 가득하던 신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찰나의 침묵 끝에 헛웃음 섞인 목소리가 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똑똑한 척하더니 멍청하구나. 네가 지금 현실로 돌아오게 된 건 레이프의 목숨과 맞바꿨기 때문이야.”
“알아.”
짧은 대답에 신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어렸다.
담담한 내 시선과 얽힌 신은 곧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는데도 그런다고?”
“아까도 말했잖아. 난 희생을 요구한 적 없다고.”
한층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아티야였다.
신과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그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조금 미안했다.
“아티야, 물러나 있어요.”
응어리진 마음은 여전했지만 지금은 감정적인 것을 내세울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아티야는 떨리는 시선으로 한참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서 물러났다.
‘휴, 다행이다.’
혹시라도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게다가 알아서 넉넉히 거리도 멀찍이 두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편 아티야가 멀어지는 것을 본 신은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이마를 찌푸렸다.
“이제는 아티야까지 구워삶다니…… 대체 무슨 수작이지, 세이딘 그웨니르?”
말 한마디로 어디까지 비약하는 거야?
터무니없는 신의 주장 덕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대놓고 ‘널 쓰러뜨릴 생각인데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를 제외한 솔직한 대답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바싹 곤두선 신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아니, 그럴 리 없어. 아무리 뛰어난 ‘캐릭터’라 해도 이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어. 하물며 ‘엑스트라’는….”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다면 신은 사람을 ‘캐릭터’와 ‘엑스트라’로 지칭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생각에 빠졌던 신이 나를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무, 무서워라…!’
공포영화가 연상될 정도로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던지라 심장이 멋대로 벌렁거렸다.
‘내가 좀 세게 나간다 싶으니까 다른 방향으로 대응해 보려는 건가?’
그렇다면 신의 노림수는 꽤 성공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긴장감 조성만큼은 확실하게 해냈으니까.
“너 뭐야?”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납득하려 하는데 느닷없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너 뭐냐니…….’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게 이 세계 놈들이 주어를 빼먹더니 신이란 양반은 목적어를 빼먹는다.
다행히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신은 말을 이어 나갔다.
“‘밖’에서 데려온 대타일 뿐인데 왜 갈수록 날 거스르는 거야? 모두에게 관심을 받게 해 줬으면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희번덕한 신의 눈동자가 더는 무섭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왜 내가 당신을 따르고 고마워해야 하는데?”
황당함이 지나간 자리는 호수처럼 고요하고 겨울바람처럼 서늘한 이성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반면 이질적인 시선으로 나를 보던 신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것도 모르냐는 무시와 조롱이었다.
“당연한 거 아냐? 네가 그렇게 지긋지긋해하던 현실에서 구원해 줬는데.”
“구원이라…….”
한없이 무겁고 숭고해야 할 단어가 왜 이리 가볍고 같잖기만 한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그렇게 웃어?”
“아니, 좀 우스워서.”
폭풍 전야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올라간 입가를 내리려 하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애초에 당신은 누구도 구원한 적이 없잖아?”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신은 나를 해칠 수 없다.
신은 세계에 관여하고 시간을 되돌리고 생사까지 좌지우지할 만큼 전능하니 힘으로 나를 짓누르면 그만일 텐데,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분노할 뿐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아까부터 요란한 알림음과 함께 눈앞을 어지럽히는 시스템창을 보면 확신할 수 있었다.
[신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온갖 귀찮고 피곤한 일을 겪게 한 장본인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시스템창은 거짓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마치 그것이 사실이라는 듯 신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형형한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모든 것들이 스치고 남은 것은 적요한 정적뿐이었다.
“역시 안 되겠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을 깬 것은 신이었다.
앳된 얼굴은 더 이상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노골적인 마음을 드러내는 걸 보다가 저렇게 가라앉은 모습을 보니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한숨 섞인 다짐이 허공에 퍼졌다.
“세이딘 그웨니르, 널 버리는 수밖에.”
어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는 것도 잠시, 나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날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곤란한 거 아니었어?”
“그래.”
순순히 대답한 신은 똑바로 나를 바라보더니 입가를 비틀어 웃음 지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직접 나설 경우고.”
그 말은 곧 간접적으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신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알고 있거든?
나는 쓸데없이 말이 많아진 시스템창을 노려보며 새벽의 망토를 둘렀다.
비웃음이 가득한 신의 얼굴이 더욱 깊어졌다.
왜 그렇게 웃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곧 밝혀졌다.
“레이프…?”
내 곁에 쓰러진 채였던 레이프가 황금빛을 띠더니 허공에 떠올랐다.
맞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줘 보지만 내 힘으로는 신에게 이끌리는 힘을 막을 수 없었다.
신에게 고스란히 넘어간 레이프는 황금빛이 이끄는 대로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호박빛 눈동자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제발…. 아니지?’
나는 성큼 다가온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언제든지 위기에 대비할 수 있도록 아이템창을 띄워 놓았다.
‘보육원을 나오게 됐을 때도 이 정도로 긴장하지는 않았는데.’
이 세계에 넘어온 것부터 시작해서 여기서 겪은 일을 모두 긁어모아 보아도 눈앞에서 벌어질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레이프 유클리드, 재능을 과신하고 나를 대적하는 대마법사.”
흘러나온 어린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울림이었다.
나는 상당히 오글거리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신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번 그 잘난 능력을 펼쳐 보렴. 네 봉인을 풀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에게.”